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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남한산성을 축성한 팔도도총섭 벽암각성(碧巖覺性)과 그의 진영(眞影)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964

남한산성을 축성한 팔도도총섭 벽암각성(碧巖覺性)과 그의 진영(眞影) 벽암(碧巖, 1575~1660년 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법명은 각성(覺性)이다. 벽암은 그의 호이다. 조선 중기 서산휴정(西山休靜)의 청허계(淸虛系)와 대응하는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문파를 형성한 걸출한 승려로 부휴선수 문파의 선(禪) 수행과 계율 실천에 투철했다. 01.<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진영>, 1780년, 비단에 채색, 122.5×83.5cm, 해인사 국일암 소장, 경남유형문화재

벽암은 어떤 인물인가

벽암은 충북 보은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해 설묵(雪黙)의 제자가 되었고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불경을 공부했다. 그 뒤 선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모시고 속리산, 금강산 등의 명산에서 정진했고, 부휴계 8대 문파를 형성하며 많은 제자와 문도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때는 스승 선수를 대신해 해전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고, 1624년에는 나라에서 요청받은 남한산성 축조의 책임을 맡아 2년 만에 완성했다. 외적 침입에 대비해 비밀리에 무기와 화약, 군량미 등을 비축하기 위한 국청사 등 7개 사찰을 세우고 산성을 수비하는 역할도 했다.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는 남한산성 축성을 2년 만에 완성한 벽암의 공적을 치하하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했다.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승려 3,000명을 규합하고 항마군을 조직해 북상했다. 이후에도 무주 적상산성의 사고(史庫)를 지키는 임무를 맡는 등 국가적 소임과 함께 종단의 승풍(僧風)을 진작했다.


02.벽암대사의 가사, 1626년, 비단, 75×230.3cm, 화엄사 성보박물관소장

벽암은 불교 역사상 가장 많은 불사를 주도한 고승으로 꼽힌다.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의 중건에 앞장서 속초 신흥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완주 송광사, 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안변 석왕사 등 수많은 불교 사원을 중창(重創)했다. 만년에는 건축, 불상, 불화를 조성하는 등 구국과 불교 중흥 활동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1660년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향년 86세, 법랍 73세였다. 제자인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이 지은 벽암의 『행장(行狀)』과 이경석(李景奭)이 찬술한 비문에 따르면 입적 후 영골(靈骨)은 중창에 관여한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종남산 송광사, 속리산 법주사, 가야산 해인사에 나누어 탑을 세우고 화엄사와 법주사 등 네 곳에 비석을 세웠다.


03.1660년경 만들어진 벽암각성의 부도.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벽암당탑(구례 화엄사 승탑원), 원조 벽암대사탑(순천 송광사 승탑원), 벽암 당탑(완주 송광사 부도원, 합천 해인사 국일암 부도원)

‘벽암존자진영’은 어떻게 그려졌나

불교 안팎에서 큰 역할을 한 벽암의 입적 후 그를 기리기 위한 부도(浮屠)와 진영이 조성되었고 비석은 두 기가 전해진다. 입적 후 다섯 곳에 세워진 부도와 함께 안치된 진영은 1780년에 조성된 해인사 국일암의 <국일도대선사 벽암존자진영(國一都大禪師 碧巖尊者眞影)>만 유일하게 전해 온다. 사찰의 진영 외에 남한산성 수축에 공적이 높은 벽암의 초상화는 산성 내 사당인 청계당(聽溪堂)에 봉안 되었으나 6·25전쟁 때 분실되고 청계당은 없어져 새로 그린 영정은 청량당(淸凉堂)으로 옮겨졌다.


해인사 국일암 진영은 어떻게 그려 모셨을까. 이곳에 영정을 봉안한 것은 이곳이 존자가 오래 머문 주처(住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적한 지 120년 뒤 새로 조성된 이유는 호은유기(好隱有璣, 1707~1785)가 쓴 『호은집(好隱集)』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나 건물이 퇴락하고 영감(影龕)이 흐릿해져 우러러 예배하는 이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다행히 올봄 문손(門孫)인 운파가 떨치고 일어나 옛 감실을 철거하고 10여 발짝 앞으로 내어 진영을 별도로 그려 옮겼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황홀하게 존자가 다시 살아난 듯하다”라고 해 감실의 중수 사실과 원래 진영이 낡고 퇴색되어 새로 그리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화면 속 주인공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바닥에는 엷은 갈색의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고 중량감 있는 건장한 체구에 앞을 응시하는 눈매와 꼭 다문 입 등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얼굴에서는 단호하고도 엄격한 고승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난다. 장삼 위에 걸친 붉은 가사에는 녹색의 조엽(條葉) 사이마다 금박을 붙였던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인조에게 하사받은 금직(金織)의 금란가사(金襴袈裟)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오래전부터 전해 오던 진영을 모본으로 1780년 화승 유홍(有洪)이 수정, 보완한 것이다. 초상의 주인공과 제작 시기가 분명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18세기 승려 진영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호은유기가 쓴 찬문(撰文)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고승 진영의 높은 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글, 사진. 김미경(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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