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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로 천오백 년의 세월을 잇는다
작성일
2021-06-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24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로 천오백 년의 세월을 잇는다 한산모시짜기 이수자 이혜랑 모시는 무더운 삼복에 짜야 했다. 시원한 여름 옷감 모시는 그런 날씨에만 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산면은 모시의 고장,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모두 모시짜기로 더운 여름을 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 무상. 어느 순간 ‘한산모시짜기’는 그 이름처럼 한산면에만 남아 있는 일이 돼버렸다. 그곳에는 묵묵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 보유자 방연옥 선생의 딸 이혜랑 이수자. 그녀는 오늘도 모시를 째고 짠다. 00.‘우수 이수자’는 2019년 무형문화재 전승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이수자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3년 이상 활동한 이수자 중에서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참여와 전승 실적이 탁월한 사람을 추천받아 1년간 우수 이수자로 지원하고 있다. 이혜랑 이수자는 2020년에 우수 이수자로 선정되었다.

아주 오래된 가내 수공업, 문화유산이 되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서 만드는 모시로, 이 지역은 여름 평균기온이 높으며 해풍으로 기후가 습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모시가 잘 자라서 품질이 우수하다. 그 때문에 한산모시는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그래서일까 오래전부터 한산면에서는 가정에서 수작업으로 모시를 짰고, 그 기술은 가내로 전승되어 왔다. 한산 지역 모시 생산자 대부분은 어머니나 시어머니로부터 이 기술을 배웠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고급 모시를 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여성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상적인 신붓감으로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1970년대를 기점으로 모시 수요는 줄어들어 갔다. 우리나라 제조업이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기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여러 가지 직물이 도입되면서 제조 난도가 높은 모시는 그 수요가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모시 옷감을 생산하던 이들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어느새 한산모시짜기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전통’의 기술이 되었다.


전통으로서 ‘한산모시짜기’는 모시풀을 이용해 전통 베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옷감을 짜는 기술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면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전에는 모시를 짜는 이들이 전체 제작 과정에 즐겁게 참여함으로써 레크리에이션적인 형태를 띠기도 했다. 공동체 활동으로서 한산모시는 바로 그 지점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산업화에 따라 모시를 짜는 이들은 줄어들었지만 남아 있는 이들이 만들어 낸 한산모시의 가치는 높아졌다. 부단한 관심과 전승자들의 노력 덕분일까. 결과적으로 ‘한산모시짜기’는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01.모시나무를 베어 모시의 겉껍질을 벗긴 후 부드러운 속살만 골라낸다. 이후 속살을 한주먹의 다발로 묶어 물에 반복해 적신 다음 말리면 태모시가 된다. 02.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 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모시날기를 할 때 실이 엉키지 않게 잘 해야 모시를 잘 맬 수 있다.

자연스레 갖고 놀던 모시, 운명이 되다

“어린 시절 어머니 일을 도우면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딴에는 모시날기를 돕겠다고, 돌돌 말았는데 너무 크게 만들어졌죠. 그러고도 ‘나 잘했지?’ 하며 어머니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모시를 친근하게, 편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병원 일을 그만둔 뒤 본격적으로 한산모시짜기를 사사하고 있는 이혜랑 이수자. 지금 그녀의 가장 큰 지원군은 둘째아들이다.


“할머니가 하는 일이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걸 매우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때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일기에다 그걸 써서 학교 선생님들도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 후로 저보다도 더 한산모시짜기에 관해 공부하고, 자기가 알아낸 걸 저한테 알려주기도 했어요.” 원래 방연옥 보유자는 딸에게 한산모시짜기를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다. 그의 어머니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힘든 작업이기에 자신의 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으리라.


하지만 방연옥 보유자가 스승 문정옥 장인을 만나 운명처럼 한산모시짜기를 배운 것처럼 그의 딸 이혜랑 이수자도 한산모시짜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전통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아직 어머니에게 기술적으로 한참 배워야 하는데, 마음만큼 손이 따라와 주길 바랄 뿐입니다.”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눈썰미로 익히고 어머니에게 배운 솜씨는 어디 가지 않았다. 모시를 째고 삼는 이혜랑 이수자의 손과 입술은 충분히 능숙하다.


03.대를 잇는 두 모녀의 산책. 옆의 건물이 공방이다.

전통의 방식으로 만들어야 가치 있어

모시짜기는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등 여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설명하면 모시를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로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데, 이 과정이 모시삼기다. 모시삼기 과정은 특히 중요한데 섬세하게 실을 뽑아 균일한 굵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옷감이 균일하고 단아한 멋이 나온다.


모시를 째고 삼기해 만든 실은 체에 일정한 크기로 담아 노끈으로 열 십(十)자로 묶어 모시굿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전통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짠다. 끝으로 물에 적셔 햇볕에 여러 번 말리는 표백 과정을 통해 비로소 흰 모시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완성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예전에는 모시짜기를 통풍이 되지 않는 움집에서 했어요. 건조해지면 모시가 끊어지기 쉽거든요. 그래서 여름에도 에어컨을 안 틀어요. 작업 과정이 힘들어서 포기하는 분도 많죠. 하지만 모두 그러면 전통은 어떻게 지켜내겠어요?” 한 세대 아랫사람인 이혜랑 이수자는 현대화된 제작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우리 전통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형문화재인 어머니 곁에서 배운, 장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외려 우리 전통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모시가 더 경쟁력이 있고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04.짜기를 할 때에는 오른손에는 북을 쥐며 왼손에는 바디집을 잡아서 짤 준비를 한다. 05.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 과정이 모시째기다.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이수자로서의 두려움, 떨쳐내고 이어갈 것

방연옥 보유자는 일생을 한산면을 벗어나지 않고 모시를 짜는 길만 걸어왔다. 자신은 그렇게 지냈지만, 딸은 그러지 않길 바랐는데……. 하지만 막상 딸에게 기술을 가르쳐줄 때면 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대를 이어 전통문화유산을 지켜 나가려는 이혜랑 이수자가 자랑스러울 뿐이다.


“어머니 곁에서 더 많이 배울 생각이에요. ‘내가 스승인 어머니만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건 모든 이수자가 다 같은 마음일 거예요.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 연습하고 문헌을 공부하고 하는 수밖에 없죠. 곁에서 응원하는 아이들 덕분에 그래도 힘이 납니다.”


모시 한 필 짜려면 땀이 서 말, 침이 석 되라는 말이 있을 만큼 고되고 힘든 작업이 모시짜기다. 과정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 일을 선뜻 하려는 이는 거의 없다. 입술에 피가 나고 굳은살이 박이도록 모시 옷감을 만드는 방연옥 보유자와 이혜랑 이수자. 전통을 생각하는 두 모녀의 마음과 노력이 실타래처럼 잘 이어져 가길 응원한다.




글. 최대규 사진. 조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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