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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작성일
2020-07-30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54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한국의 산지승원은 모두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아 산 안쪽에 위치한 입지 특징을 지녔다. 7~9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가 전해졌는데, 당시 사찰들이 수도인 경주 등 도시에 위치한 것과 달리, 세계유산에 등재된7개산사는 모두 산지에 지어졌다. 이는 우리 불교 역사의 시대적 변모를 담아온 이 문화유산이 ‘수행의 장소’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01.영주 부석사 안양루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위치한 누각이다. ‘안양’은 극락을 가리킨다. 즉, 이 문을 지나면 극락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02.소림사 고루(鼓樓) 소림사는 얼핏 ‘권법’이 연상되는 곳이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선종의 본산으로 달마대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자연과 함께 ‘선(禪)’으로 들어가는 한국의 산사

2018년, 대한민국의 천년고찰 7곳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산사(山寺)란 산에 있는 절을 말하며, 절은 사찰 혹은 가람(伽藍)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saṃghārā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승가람(僧伽藍)의 준말로,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니[優婆尼])이 함께 모여 수행하는 도량(道場)이다.


그 기원을 살펴보면 석가모니가 불법을 전도(傳道)하는 초창기에는 일정한 거처 없이 두타행(頭陀行)을 하셨지만, 우기가 긴 인도에서 우기 3개월 동안은 한곳에 모여 수행 정진하는 안거(安居)가 생겨났으며, 이때 생겨난 최초의 사찰은 바로 죽림정사(竹林精舍)이며 기원정사(祇園精舍)이다. 이처럼 포교와 고행을 겸비했던 두타행은 인도의 기후 특성에 따라 안거로 이어지고, 이러한 안거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자아의 성찰과 조예의 심화로 다시 하화중생의 기조를 마련한 셈이다. 이는 움직이기 위해 한껏 몸을 움츠리는 적정(寂靜)의 상구보리로 동정을 겸비한 정신세계이다.


절은 입지 장소에 따라 크게 평지형과 산지형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절 역시 통일신라 이전에는 초기 불교 형태로 도성에서 가까운 곳 혹은 도성 안 평지에 세운 평지형 가람으로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로 존재하였지만, 통일신라 이후 선불교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 산지형에 속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7개 산사 역시 모두 산지형 가람에 속한다.


03.보물 제799호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절 마당에는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는데,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04.소백산 기슭에 위치한 영주 부석사. 안양루 너머로 바라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절의 본래 기능에 충실한, 산사

우리나라에 유독 산에 가람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이들은 선(禪) 사상의 전래와 함께 풍수지리설 그리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사회적 요인으로 산에 분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지형이든 산지형이든 가람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여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절의 본래 기능인 수행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우리나라는 선(禪)불교가 전래되기 전인 통일신라 이전에는 강경(講經)을 중심으로 교종(敎宗)이 우세하였지만, 통일신라 이후 선불교가 전래되면서 교종의 쇠퇴와 함께 선불교가 유행하게 된다.


후에 교선(敎禪) 융합 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임제종(臨濟宗)을 중심으로 선종(禪宗)이 발달했으며 수행 방법 역시 간화선(看話禪)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산지승원 역시 산속에 위치해 있어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섬과 동시에 범속(凡俗)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섬을 상징한다. 이를 지나면 잡귀를 물리치고 부처님의 세계를 수호하는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을 배치한 천왕문(天王門) 및 금강문(金剛門)을 지나게 되고, 해탈문(解脫門)을 통해 사찰 경내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는 바로 홍진세속(紅塵世俗)에서 벗어나 불법(佛法) 세계로 진입을 상징한 것이다. 자연에서 자신의 마음속 선(禪)을 추구하는 수행 공간으로서 사찰의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공간으로서 ‘절’이 지닌 전통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라는 이름으로 한곳에 모여 용맹정진 수행하는 형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05. 사적 제503호 보은 법주사.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가 있어 신앙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06.소림사 전경. 현재의 소림사는 주로 명대, 청대에 만들어진 공간이 많다. 중국 왕조가 바뀔 때마다 증축을 거듭하며 더욱 웅장해졌다. 주요 건물은 중앙축을 따라 배치되어 있고, 대칭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건축적 특징이다.

선종의 본산, 소림사

정주(鄭州) 숭산(嵩山)의 소실산(少室山)에 위치한 소림사는 우리에게 쿵푸로 이름난 절이다. 소림권법이 연상되는 곳이지만, 본래 이곳은 선종(禪宗)의 본산이다.


《황당숭악소림사비(皇唐嵩岳少林寺碑)》에 따르면, 태화(太和) 19년(495년)에 인도 승려 발타(跋)를 위해 후위(後魏) 효문제(孝文帝)가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 발타는 불법(佛法)을 전수하였으며 그의 제자로는 지론종(地論宗)의 초조이자 광통율사(光統律師)로 불리는 혜광(慧光)과 “총령의 동쪽(중국) 지역에서 선학의 으뜸”이란 찬탄을 받은 승조(僧稠)가 있다.


영평(永平) 원년(元年, 508년)에 삼장법사(三藏法師) 늑나마제(勒那摩提)와 보리유지(菩提流支)는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였다. 이후 양(梁)나라 때 우리에게 친숙한 험상궂은 인상과 부리부리한 눈매의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행하여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란 이칭을 얻기도 했다.


보리달마는 ‘벽관(壁觀)’ 즉, ‘이입사행(二入四行)’을 통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였다. 벽관의 요체는 ‘밖으로는 모든 반연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 안으로는 마음에 혼란을 없애 마치 장벽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곧 깨달음에 들어갈 수가 있다’이다.


이는 양 무제(武帝)가 “불교의 성스러운 교의 가운데 첫째는 무엇이오?”라고 묻자 달마대사가 “성스러운 진리란 없다[廓然無聖]”라고 답하고, “그대는 누군가?”라는 질문에는 “알 수 없다[不識]”라고 이야기한 것과 맞닿아 있다. 모든 집착과 혼란이 사라진, 가장 고요한 심리상태가 바로 ‘알 수 없는 마음의 경계’로, 이런 경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밝은 지혜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이다. 바로 알 수 없는 것을 통하여 알아가는 역설의 수행법이다. 이는 깊은 산골 고요한 연못에 흔들림 없이 비친 아름다운 삼라만상의 모습과도 같다.


달마선의 동원이류(同源異流)

소림권법의 기원과 관련하여 혹자는 달마대사가 고된 면벽 수행으로 건강을 염려하여 저술한 《역근경(易筋經)》으로 추정하나 이 또한 위작이라는 설이 있을 뿐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정적인 마음 수행과 신체 단련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는 있으며, 이것이 현재 소림사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선종 사찰로서 우리나라 산사와 소림사는 원류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큰 맥락은 같았지만, 파생되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 구체적인 흐름은 한중 양국 간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선은 내면 지향에 중점을 두어 철저한 오도(悟道)의 경지를 추구하는 데 비해, 중국의 소림사는 역동적인 무예를 통하여 심신을 수련한다. 그 아래 추구하는 바는 같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하겠다.



글, 사진. 박소현(베이징대학교 중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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