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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답사기] 원성왕의 신공사뇌가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09-27
조회수
5750
작성자 : 강윤수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인기 영화배우 이영애 씨 혹은 스포츠 스타 미셀 위를 내일 아침에 만난다면 오늘 난 무엇을 준비할까? 멋진 단장 혹은 근사한 멘트를 준비하기 보다는 아마 그들이 출연한 영화나 출장한 게임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취미, 관심사 및 친구관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그런 준비를 통해서만 흥미로운 대화가 가능할 것이고 또한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유적지를 답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작정 떠나는 답사는 역사와의 의미 있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반면, 준비된 답사는 흥미와 만족의 연속이다. 충분히 이해한 후에 경주 황룡사지의 들판에 서면, 다소 걱정스런 얼굴로 목탑을 열심히 세우고 있는 장인 아비지와 형형한 눈빛으로 그 목탑을 바라보는 자장법사, 그리고 공사 총책임을 맡고 있는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산 탑곡의 마애조상군을 만나고 온 후라면 황룡사의 구층 목탑을 선명하게 그려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좀 더 준비된 답사라면 백고좌법회에서 제외되었던 원효대사가 황룡사에서 강론하는 모습 또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괘릉전경
<괘릉전경>
그래서 나는 내일 아침에 뵙게 될 원성왕께 부끄럽지 않도록 지난 일주일 동안 틈틈이 이번 답사를 준비해왔다. 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외동은 경주시내에서 한참을 가야한다. 흔들리는 차창 밖의 일요일 아침 풍경은 평온하기만 한데, 나는 일 년 만에 왕을 다시 뵙는 기쁨으로 들떠있다. 작년 나는 분황사의 삼룡변어정 곁에서 왕을 뵈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의 요술쟁이들을 시켜 분황사의 용, 동지의 용, 청지의 용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대나무 통에 넣고 도망가는 것을 영천까지 따라가셔서 잡은 후에 용을 우물에 원래대로 놓아주고 계셨다.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이다. 혜공왕(36대: 765-780)때 그는 이미 실력자로 등장한다. 혜공왕 15년(779), 회오리바람이 일어 김유신 장군묘에서 시조 대왕 능 까지 먼지와 안개가 자욱했고, 능에서 김유신장군이 시조대왕에게 자신의 자손들이 핍박 받는 것을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일어난다. 혜공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대신을 보내 김유신 묘에 제사를 올리며 사과(謝過)를 하는데, 이 때 제사를 올린 대신이 바로 김경신이다.

당시의 상대등은 김양상이었는데, 김양상과 김경신은 당대의 최고 권력가로 보인다. 그런데 혜공왕 말년(780)에 김지정의 난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라가 불안하여 반란이 일어났으며, 김양상과 김경신이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그 와중에 반란군이 혜공왕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혜공왕이 여자처럼 행동하고 도류(道流)와 희롱하고 놀아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났고, 선덕왕과 김경신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학(儒學)에 기초한 삼국사기와 불도(佛道)에 기초한 삼국유사의 또 다른 충돌이다. 분명한 것은 반란으로 혜공왕이 살해되었으며, 그 후 김양상이 선덕왕(37대: 780- 785)으로 즉위를 했고, 김경신이 상대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전경
<괘릉전경>
어느새 차는 불국사 입구를 지나 원성왕릉에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선덕왕은 재위 5년(784)에 무슨 이유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으며 누구에게 양보하려 했던 것일까? 선덕왕은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왕권을 양위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상황을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다”라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하여 왕의 조카뻘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때 주원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 북쪽 20리에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주원은 상대등 김양상이 혜공왕에게 정치상황에 대해 강력한 시정을 요구한 그 해 시월에 시중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따라서 선덕왕이 김주원을 후원했던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선덕왕이 죽자 김주원은 홍수로 범람한 북천을 건너지 못하고, 그 사이에 김경신이 왕궁에 먼저 도착하여 원성왕(38대: 785-798)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지도를 놓고 김주원이 살았다는 경주 북쪽 20리를 찾아보면 현재의 천북면 동산리 혹은 모아리 부근이 아니라면 깊은 산속이라는 사실이다. 걸어서는 월성까지 두 시간이 훨씬 넘게 소요되는 거리이다. 왕경에서 멀리 벗어나 거주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권력의 중심원에서의 소외를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선덕왕이 김주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김주원이 경주에서 살 수 없게 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덕왕이 실력자 김경신을 두려워하여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비로소 원성왕릉이 있는 괘릉에 당도하였다.

소나무가 고적하게 늘어서 있는 틈새로 대나무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괘릉 진입로에 들어선다.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의 괘릉은 옅은 안개로 덮여 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문을 들어서는 순간 당황스런 안내판이 서 있다. 소나무 방제를 위해 맹독성 농약을 살포했으니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소나무 밭의 출입을 금한다는 말일 것이다.

왕릉의 맨 앞에는 한 쌍의 화표석이 있다. 팔각형의 화표석은 아마도 불교의 기본 교리인 팔정도 혹은 도교사상의 하늘을 상징하여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봐도 기둥면에 글이 새겨졌던 흔적은 없다. 그런데 화표석의 윗면을 올려다보니 소프트볼보다도 좀 큰 반구(半球)가 조각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나의 지식의 일천함을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발견이다. 반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늘일까, 태양일까, 혹시 지구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식일까?



릉입구좌측의문,무인상및석물
<릉입구좌측의문,무인상및석물>
화표석 뒤에는 한 쌍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무인석상이 있다. 석상의 몸통은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머리는 능의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서쪽 무인상은 오른 손을 내려 철퇴를 잡고 있으며 주먹을 불끈 쥔 왼손을 가슴에 대고 있다. 동쪽 무인상은 왼손에 철퇴를 잡고 있는데 서쪽 무인상과는 달리 철퇴 고리를 팔목에 끼우지 않은 채로 쥐고 있다. 무인상은 동일한 옷을 입고 있는데 철퇴를 쥔 팔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 있고 주먹을 쥔 팔의 소매는 팔목을 덮고 있다. 하의는 발목을 덮을 정도로 긴 치마인데, 측면이 허리까지 열려있다. 철퇴와 어울리지 않게 복장은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크며 쌍꺼풀이 진 움푹한 눈, 크고 높으며 끝이 구부러진 매부리코, 심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굳게 다문 큰 입, 숱이 많고 길며 곱슬곱슬한 수염 등의 외모는 이들이 서역인임을 시사한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둥근 터번은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는데, 허리춤에 차고 있는 복주머니는 그들이 신라에 정착한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무인석의 뒤쪽에는 한 쌍의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문인석상이 있는데,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서쪽 석상의 관 가운데에는 탑과 같은 문양이, 동쪽 석상의 관에는 거북 혹은 꽃봉오리 같은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눈썹은 음각으로, 눈은 작고 가늘게 표현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면 다리 사이에 막대기 혹은 칼이 보이는데, 뒷면을 보면 관복 아래에 갑옷을 입고 있어 이들도 무장한 호위병임을 알 수 있다. 외모로 볼 때 위구르 인으로 판단된다고들 한다. 그 뒤쪽에는 네 마리의 사자석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얼굴 표정, 귀의 모양, 갈기의 모양, 꼬리의 형태, 네발의 자세 등이 각기 개성적이어서 이름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이다. 동쪽 전면 사자상은 이를 악물고 정면(서쪽)을 보고 있으며, 동쪽 후면 상은 몸을 뒤로 젖혀 활짝 웃으며 왕릉(북쪽)을 보고 있다. 서쪽 전면 상은 무서운 표정으로 능의 바깥쪽(남쪽)을 응시하고 있으며, 서쪽 후면 상은 코를 치켜 올려 상대를 비웃는 모습으로 정면(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왕릉 앞에는 정남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껴난 석상(石床)이 초석 위에 만들어져 있다. 석상의 측면은 4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좌우측 판석의 옆면이 정면과 후면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네 면 모두에 각각 연꽃과 같은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는데, 성덕왕릉의 석상에 새겨진 문양과 동일한 것이다.

원성왕은 재위 14년(798) 음력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증손자인 애장왕(40대: 800-809) 청명이 11세인 것으로 보아 원성왕은 장수(長壽)한 것으로 보인다. 유언에 따라 봉덕사의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하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왕릉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논란 끝에 토함산의 서쪽에 있는 동곡사(洞鵠寺) 절터에 왕릉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는데, 동곡사라는 이름은 절터 안에 있던 고니(鵠)모양의 바위에 연유한다고 했다. 왕릉의 조성을 위해서는 먼저 동곡사를 옮겨야 했는데 기와를 걷고 서까래를 뽑아 간 곳이 현재의 숭복사지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성왕릉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이 약 23미터, 높이가 약 6미터이다. 능을 두르고 있는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로 무장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그 보존상태가 아주 훌륭하다. 특히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말의 모양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의 둘레에는 부채꼴 판석으로 회랑이 조성되어 있는데, 회랑 둘레에는 네모진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고, 상하 2단의 관석을 끼운 돌난간이 조성되어 있다.

원성왕릉의 현재 공식명칭은 괘릉이다. 속설(俗說)에 따르면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파니 연못처럼 물이 솟구쳐 왕의 유해를 담은 관을 묻지 못하고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기 때문에 걸 괘(掛)자를 사용해 괘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괘릉을 방문한 사람은 이 속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을 느낀다. 맑은 날에도 석조물과 왕릉의 중간부터 시작하여 왕릉의 뒤편까지 잔디밭이 흥건한 정도로 젖어 있기 때문이다.

괘릉이 원성왕릉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동곡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니 모양의 바위이다. 괘릉에 이 고니 바위가 있다면 괘릉은 동곡사 터이며 곧 원성왕릉이 된다. 그러나 능역 내에서 큰 바위를 찾아 볼 수 없었다. 혹시 있었더라도 왕릉을 조성할 때 없앴을 것이다. 신라왕릉 곁에 큰 바위가 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동곡사를 처음 조성할 때 연못을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면 이 또한 괘릉이 원성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나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명확한 것은 원성왕릉의 위치가 토함산 서쪽이었으며, 능역은 호위하도록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괘릉처럼 잘 만족시키는 능은 없다. 괘릉이 원성왕릉이라는 사실은 정인보가 여러 문헌기록을 통하여 고증하였고, 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하여 강력히 뒷받침되었으며,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정설로 굳어졌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괘릉은 연못과 연관이 되어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연못에 묻힐만한 신라왕으로는 원성왕밖에 없다. 원성왕은 물의 왕(水王)이다.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 천관사의 우물에 들어가는 꿈을 꾼다. 김주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북천(北川)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북천의 범람은 그에게 왕위를 보장한다. 왕이 된 후에는 동지(東池), 청지(靑池), 분황사의 우물에 사는 삼룡을 구한다. 월성 내에 있던 금광정(金光井)에서 자라가 준 여의주를 가진 묘정을 가까이 했던 왕도 원성왕이었다. 그런 왕의 시신이 수시로 범람하는 북천 남쪽의 봉덕사 부근에서 화장되어, 연못처럼 물이 솟는 괘릉에 묻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첫 번째 질문은 원성왕릉에는 성덕왕릉(33대: 702-737)이나 흥덕왕릉(42대: 826-836)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귀부(龜趺)가 없다는 점이다. 원성왕은 새로운 지배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만큼 원성왕계 후대 왕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과연 그 비석과 귀부는 어디에 묻혀 있을까? 또 다른 하나의 질문은 원성왕이 어느 전왕(前王)의 동생이었던 가에 대한 것이다.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도달하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라고 했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2대 손이고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 손이기 때문에 선덕왕은 여기서 말하는 전왕이 아니다. 내물왕의 12대 손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는 효성왕(34대: 737- 742)과 경덕왕(35대: 742-765)뿐이다. 물론 이 두 왕의 아버지는 성덕왕(33대: 702-737)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은 나에게 숙제로 남겨졌다.

괘릉을 돌아 나오면서 원성왕이 진실로 인생의 곤궁(困窮)과 영달(榮達)의 이치를 깨달은 후에 지었다는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의 한 마디 쯤은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허공에서 어렴풋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3이 공부 좀하면 안 되겠니?” 어머니가 불러주는 나의 노공사뇌가(勞空詞腦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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