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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근정전, 근정문, 월화문, 일화문]
등록일
2010-02-16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298



 

3. 근정전 권역








3-h-1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




위치와 연혁 :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며 그 남쪽 문이 근정문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일이 모두 이 곳에서 거행되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원전 1>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했다. 1867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뜻풀이 : ‘근정(勤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함’을 의미한다. 정도전이 ‘치세가 이루어지려면 정사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경전의 표현을 빌려 작명하였다. 정도전이 임금에게 올린 ‘근정(勤政)’의 뜻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자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사처럼 큰 일이야 어떻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근심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십시오.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깁니다. 여러 관원들의 직책을 폐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봉양 받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를, ‘천하와 국가의 일로 임금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스스로를 낮추어 노고를 하십니까?’ 하기도 합니다.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임금은 이것이 자신을 사랑함이 두텁다고 여겨, 자연히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습니다. 신은 이로써 이름짓기를 청하옵니다.”<원전 2>


 

근정전 제작 정보 :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흥민(李興敏)이 썼다.<원전 3>이흥민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년) 때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고 고종대에도 도승지 등 높은 관직에 있었던 문신이다.‘근(勤)’ 자는 왼쪽 변의 아래 쪽에 가로획이 하나 생략되어 있는데, 서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근정문 제작 정보 :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신석희(申錫禧, 1808~1873년)가 썼다. 신석희는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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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1>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丁酉), “命判三司事鄭道傳, 名新宮諸殿. 道傳撰名, 幷書所撰之義以進. 新宮曰景福, 燕寢曰康寧殿, 東小寢曰延生殿, 西小寢曰慶成殿, 燕寢之南曰思政殿, 又其南曰勤政殿, 東樓曰隆文, 西樓曰隆武, 殿門曰勤政, 午門曰正門.”

<원전 2>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 (丁酉), “天下之事, 勤則治, 不勤則廢, 必然之理也. 小事尙然, 況政事之大者乎? 書曰, 儆戒無虞,罔失法度. 又曰, 無敎逸欲有邦, 兢兢業業, 一日二日, 萬機. 無曠庶官, 天工人其代之, 舜禹之所以勤也. 又曰, 自朝至于日中?, 不遑暇食, 用咸

<원전 3> 『고종실록』 권3, 고종 3년 12월 9일(甲午), “命營建都監上樑文書寫官, 勤政殿金炳德, 思政殿洪祐吉, 勤政門李敦相, 弘禮門李承五. 懸板書寫官, 勤政殿李興敏, 思政殿曺錫雨,勤政門申錫禧, 弘禮門金世均差下.”



3-h-2 월화문月華門




위치와 연혁 :
근정문의 서쪽에 난 작은 문이다. 1395(태조 4) 년에 처음 지었으며,<원전 1> 임진왜란 때 불탔다.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무반은 월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뜻풀이 :
‘월화(月華)’란 ‘달의 정화’를 뜻한다. ‘달[月]’은 음양의 이치에서 음(陰)의 성격을 띠므로, 서쪽 문의 이름으로 택했다.
 
 
 

3-h-3 일화문日華門


위치와 연혁 :
근정문의 동쪽에 난 작은 문이다.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원전 1>, 임진왜란 때 불탔다.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월화문과 짝을 이룬다.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문반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뜻풀이 :
‘일화(日華)’는 ‘해의 정화’를 뜻한다. ‘해[日]’는 음양의 이치 상 양(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선정전 앞에 있던 두 문 가운데 하나를 일화문으로, 다른 하나를 월화문으로 지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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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1>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9월 29일(庚申), “殿門三間, 在殿之南. 左右行廊各十一間, 東西角樓各二間. 午門三間, 在殿門之南, 東西行廊各十七間, 水閣三間, 庭中有石橋御溝, 水所流處也. 門之左右行廊, 各十七間, 東西角樓, 各二間. 東門曰, 日華 , 西曰, 月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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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1]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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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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