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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욕탕에 들어가다 목욕에 대한 한국 생활문화의 변화
작성일
2019-12-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09

목욕탕에 들어가다 목욕에 대한 한국 생활문화의 변화 새해가 밝아오면 한 해 동안 묵은 때를 벗기고 새로운 살갗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할 것 같다. 고개를 들어 건물 사이 높게 솟은 굴뚝을 찾아보지만 목욕탕이라 적혀 있는 굴뚝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대형 사우나의 보급과 집집마다 설치된 욕실의 발달로 목욕탕은 추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했던 우리 삶의 모습도 점차 희미해지고있다. 현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한 번씩은 몸을 씻는다. 씻는 행위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관찰되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문화로 발달시킨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한국 역사에서 목욕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과정은 어떠하였을까?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 역사 속의 목욕

목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의 목욕은 일상적인 목욕과 의미가 달랐다. 물은 신성한 존재였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서도 물이 등장한다.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알로 발견된 박혁거세는 동천에서 목욕을 하자 비로소 광채를 발하였다고 하며, 그와 혼인하는 알영 역시 태어난 후 북천에 씻기니 입에 달려 있던 닭의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 시기의 목욕은 주술성이 가미된 의례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목욕에 대한 의례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난 일화로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해산 후 목욕을 원하는 산모에게 노힐부득은 목욕을 시켰는데 그 후 목욕물이 금빛으로 변하고 향내가 나기 시작하였다. 산모는 관음보살로 변하여 그 물에 목욕을 권하였고 노힐부득은 미륵존상이 되었다. 달달박박 역시 이 물에 목욕을 한 후 똑같이 되었다. 이는 신성한 것과 접촉한 물로 몸을 씻으면 몸을 씻은 자도 신성해진다는 접촉 주술의 사고를 보여줌과 동시에 목욕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종교적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사고를 나타낸다.



02.목욕하는 사람들 조선시대 46.4*104.8 덕수373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03.조선 후기부터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증막 인천광역시 강화도 교동면 고구리 산233번지 ⓒ이인혜 04.인천 월미도 조탕 내부 모습이 인쇄된 우편엽서 13,7*8.6 민속087763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고려 시대의 목욕은 종교적 의례에 수반되는 절차이거나 접대나 영접의 수단, 치료의 수단이었다. 충숙왕의 경우 목욕에 드는 재료의 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 달 동안 향료를 10여 항아리, 수건으로 저포 60여 필을 목욕에 사용하였다. 고려 인종 때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3권 한탁 편에는 고려 시대의 목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기록에서 고려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번씩 시내 가운데서 목욕을 하였다. 남녀가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목욕을 하는데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시대 목욕의 개방적인 분위기는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은밀한 행사로 바뀐다. 단오나 유두절, 복날 등 계곡에서 물맞이를 하는 일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양반 집에서 목욕은 씻는 신체 부위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가 여러 가지로 나뉘는 부분욕의 형태로 변화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욕의 종류와 용법, 목적 등이 기술되어있는데 그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치료를 위한 온천욕과 기도나 의례를 위한 목욕, 일상적인 목욕이 해당한다. 이중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온천욕으로 왕을 비롯하여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다. 왕이 온천에 가는 목적은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세종대왕이 안질 치료차 온양에 행차한 후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이 이곳에 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를 위해 머물렀다. 그리고 피치 못할 경우에는 온천물을 궁궐로 가져와서 목욕물로 사용할 것을 권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과 영조실록에 남아있다. 온천 외에도 한증막을 이용하여 땀을 빼는 방식으로도 목욕을 하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는 조선 후기부터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증막이 아직 남아 있다.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축조된 이 한증막은 둘레 15m, 직경 4.5m,높이 3.0m이며 면적 16㎡로 여럿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혼천, 한증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목욕을 하기도 했지만, 일상적인 목욕방식은 더러워진 신체 일부를 닦아내는 부분욕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목욕 용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야이다. 발 씻는 용도, 얼굴 씻는 용도 등 한 사람당 사용하는 방법과 부위에 따라 세 개 정도의 대야를 사용했다고 한다. 임원경제지 섬용지 회도제기에는 몸 씻는 여러 가지 도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글에 등장하는 목욕용품은 대야 이외에도 실내에서 세수를 할 때 물이 튀지 않게 하는 깔개, 양칫물 사발, 조두합, 세수치마, 목욕통, 탕관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일상적으로 행하는 부분욕 외에도 몸을 씻는 것과 관계가 깊은 날이 있다. 3월 상사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칠석으로 이날에 계곡에서 머리를 감거나 물을 맞았으며 몸을 담그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세시풍속은 몸을 씻는 동안 병을 물리치거나 피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공중목욕탕 : 전염병 방지와 유흥 사이에서

19세기 후반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콜레라가 조선 사회를 강타하면서부터 목욕탕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1896년 5월 19일 독립일보에서는 병을 예방하기에는 깨끗한 것이 제일이라며 목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897년 1월 14일 독립신문 기사에는 북청 출신의 강학기라는 사람이 청계천변 수표교 옆에 있는 일본인의 목욕탕에서 오줌을 싸서 논란이 된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1897년에 이미 일본인이 사대문 안에 목욕탕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으며 한국인들도 그곳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0년을 넘어서면서 신문에는 목욕탕에 대한 광고 기사가 빈번하게 기재된다. 횡성신문 1903년 12월 5일 광고에는 무교동 취향관에서 내외국 요리를 재편하였음을 광고한다. 목욕탕에서 목욕 서비스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고급요리도 제공하였음이 드러난다. 부산의 동래온천, 인천 월미도 조탕 등 1920년도부터 상업화되기 시작한 이들 목욕탕도 휴양과 유흥을 위한 곳이었다.



도시화와 새마을운동

공중목욕탕의 가파른 증가는 도시화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도시로 점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시에서 적산 목욕탕을 시영으로 운영하는 등 직접적으로 도시민의 보건과 위생증진에 개입하려 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 대중목욕탕의 수는 전국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서울 등 도시에 더욱더 많은 공중목욕탕이 개업하였다. 한편 농촌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 국제협력처의 원조를 받거나 새마을운동의 전개로 마을 단위로 마련된 공동기금을 기반으로 목욕탕이 건설되었다.



05.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 행화탕 남성탈의실 2007년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06. 국내산 원단에 이탈리아산 실 꼬는 기계인 연사기와 염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이 이태리타올이 되었다고 한다. ⓒ이인혜



확연히 다른 남탕과 여탕

공중목욕탕이 우리가 흔히 아는 남탕과 여탕, 사우나로 형성된 것은 그 시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1959년에 문을 연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의 행화탕에서 초창기 목욕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08년에 문을 닫은 행화탕은 영업 당시 매표소, 여탕 탈의실, 남탕 탈의실, 여탕, 남탕, 그리고 각각의 탕에 딸린 사우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장은 남탕과 여탕이 서로 뚫려 있어서 여탕에서 세신사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남탕까지 들렸다고 한다. 남탕에는 이발할 수 있는 이발 의자가 있고, 여탕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두고 간 목욕 바구니가 놓여있었다.



나라시·때밀이·세신사

공중목욕탕에서 이용객의 때를 밀어주는 직업은 현재 형태의 공중목욕탕이 정착된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하나 언제부터 직업이 되었는지,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70년 10월 28일 경향신문 신문기사에 세운상가의 남성사우나탕에서 일하는 ‘때밀이’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탕보다 남탕에서 먼저 때를 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직업은 초기에는 ‘때밀이’라고 불렸으나 1993년 통계청에서 표준직업을 개정하면서 욕실종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세신사, 때밀이, 나라시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1968년 6월 26일 매일경제 특허등록 기사를 보면 목욕용접찰장갑이라는 이름으로 때를 밀 때 사용하는 ‘이태리타올’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김필곤이라는 사람이 비스코스 레이온 소재를 꼬아서 만들었는데 국내산 원단에 이탈리아산 실 꼬는 기계인 연사기와 염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이 이태리타올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한국의 목욕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품목이 되었다. 그 후 1980년대 후반에 등을 밀기 어려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자동 등밀이 기계가 발명되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공중위생법상 목욕업으로 등록된 업소의 수는 전국적으로 총 6,911개소다. 공중목욕탕뿐만 아니라 특급호텔의 사우나부터 시작하여 24시간 찜질방 등 대형 사우나도 모두 포함한 통계자료로 일반적인 공중목욕탕으로 한정할 경우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 목욕업의 수는 1990년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0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앞으로 목욕업의 수는 더욱 가파르게 줄어들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공중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글. 이인혜(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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