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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개항 도시 인천과 목포
작성일
2009-11-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634


 

외세의 침탈과정 속에서 성장한 두 도시

인천과 목포의 개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영사관은 항구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 주위로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거류지 가로는 질서정연하게 조성되었고, 각종 위생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500m이내) 동쪽 산에는 신사와 사원을 세웠으며, 인근에는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이러한 배치수법은 근대개항도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거류지는 원칙과 기준을 바탕으로 도시공간이 형성되었지만, 개항장으로 몰려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할 만한 공간은 없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항구와 가까운 산기슭이나 평지에 무질서하게 집을 세워 나갔다. 가로는 미로였으며, 위생 상태는 불량했다. 이것이 외세의 침탈과정 속에서 성장한 근대개항도시 인천과 목포가 갖는 이중성이다.



각국의 문물이 넘치던 국제도시인천

인천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로 인천국제공항 개항을 기점으로 경제자유구역이 가시화되면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 가려 2류 도시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었지만,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사실 인천이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린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126년 전에 이미‘제물포(Chemulpo)’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으며, 개항장 인천은 각국의 문물이 넘치던 국제도시였다.

개항 이후 유럽인과 일본인, 중국인은 인천에 그들만의 생활공간인 ‘조계지’를 확보했다. 측량으로 도로와 가구를 구획하고, 공원을 설치하는 등 서구식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이는 인천의 도시공간구조가 되었으며, 해안은 매립으로 그 모습이 변하게 되었다. 매립은 주로 자신들의 영역확대를 끊임없이 획책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일본인의 거주지와 군사용지 확보를 목적으로 해안을 매립했다. 인천에 진출해있던 외국인들은 이렇게 확보된 땅위에 자신들의 건축물을 세웠다. 건축양식은 당시 자국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으며, 자재는 배를 통해 들여왔다. 이로써 응봉산 남록(제물포)에는 여러 나라의 건축물이 들어선 외국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후 1900년대 초반까지 인천은 국내 최고의 국제도시였다. 다른 개항도시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로 양분되어 발전한 것과 달리 인천에는 일본인거주지 외에 중국인거주지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각국조계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인의 세력이 커지면서 중국인과 유럽인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속속 일본인이 차지하여 일본인마을은 계속 확대되었으며, 일제강점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비즈니스타운

인천 개항장에는 해운업을 하던 해운회사의 건물, 인천경제는 물론 한때 우리나라 전체경제를 좌우했던 은행 건물이 무리를 이루어 현존하고 있다. 이름 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비즈니스 타운’이다. 이 일대에는 우리나라 근대건축물 가운데 번사창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1888년)과 구 일본제18은행인천지점(1890년), 구 일본제58은행인천지점(1892년), 구 일본제1은행인천지점(1899년), 구 군회조점(1902년)이 불과 100m이내의 거리에 밀집되어 있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과 구 군회조점은 보수공사를 거쳐 인천아트플랫폼의 일부로 사용 중이다. 구 일본제18은행인천지점은 인천근대건축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구 일본제1은행인천지점은 보수와 전시공사를 거쳐 조만간 ‘근대최초사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한마디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비즈니스타운이 문화예술존으로 변모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외에도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일선빌딩(1932년)은 4층 규모의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으로 1층 부의 장식이 아름답다.


천상의 미를 간직한 답동성당

답동성당이 위치한 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사원이 많다하여 ‘사정寺町’이라 불려졌다. 주위에 산재되었던 일본불교사찰과 신사는 사라지고 성당만 남아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다. 현재의 답동성당은 두 번째 성당으로 최초의 성당은 빌렘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뒤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고딕양식의 단층 건물로 세웠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재 성당은 1933년에 착공하여 1937년 드뇌 신부에 의해 완공되었다.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정면과 함께 건물 전체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의 회색이 어우러져 조화롭고 아름다운 외관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에 설치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적 상승감을 더욱 높이고 있으며, 이 종탑에는 각각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pilaster)이 8각角의 종머리 돔(dome)을 지지하고 있다. 원래는 작은 첨탑에도 종이 있었지만, 이곳의 종은 중앙종탑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으며, 작은 첨탑은 비어있다.

성당 앞에 위치한 인천가톨릭회관을 돌아가는 S자 모양의 현재 진입로와 달리 원래 진입로는 직선으로 연결된 계단이었다. 답동성당은 건축 이래 인천지역의 상징적 건축물이며, 인천교구 내 56개 본당의 주교좌 성당이다.



호남 제일의 항구도시 목포

목포개항은 1889년 일본인에 의해 거론된 이후 1897년 10월 1일에 개항되었다. 목포가 개항장으로 선정된 이유는 영산강의 강입구와 가까워 내륙소비시장까지 기선으로 직접 운항이 가능했으며, 나주, 광주 등 큰 배후시장이 있어 화물의 집분산이 용이하며, 전라도 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운반하는데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에 거주하려는 외국인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각국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조계지의 위치 선정과정부터 관여한 일본은 해안과 인접한 유달산 자락에 터를 잡았고 이곳에 구획된 시가지는 인천조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도시 목포는 각국공동거류지구역과 목포군 부내면 구역으로 구분된다. 목포개항으로 일본영사관일대에는 외국인거류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은 근대식 도시계획이 적용되어 격자형가로망과 각종 위생시설을 갖춘 공간이었다. 그러나 개항장 목포를 찾아 고향을 등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땅히 거주할 땅이 없어 무덤을 옮기고 그 자리에 터를 잡아야만 했다. 가로는 무질서했으며, 위생설비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전형적인 불량주거지였다. 근대도시 목포는 이처럼 상이한 두 공간인 일본인거류지 1㎢와 조선인 거주지 1.33㎢에서 출발했다. 개항초기 목포에는 일본영사관 앞을 중심으로 해안을 향하여 상가, 주택, 공장, 창고가 세워졌다. 이후 해안매립이 진행됨에 따라 무안가도를 향해 동쪽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갔다. 근대도시 목포의 전성시대는 1930년대였으며, 조선시가지 계획령(1936년 6월 발포)에 따라 1936년에는 1965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도시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목포일본영사관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진출하려는 세계 각국은 우리나라 곳곳에 자국의 영사관을 세웠다. 개항장에 서구열강이 앞 다투어 영사관을 세운 것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것보다는 한국 내에의 자국의 입지를 굳히고 세계 각처에서 대립관계에 있던 국가와의 사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항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이처럼 영사관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영사관을 우리나라 침탈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을사늑약이후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일본영사관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대부분 이사청이 되었다. 이사청은 외교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일본의 행정관청으로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다. 목포일본영사관은 개항기 일본이 우리나라에 세운 영사관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로 목포는 물론 국내에서도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목포일본영사관은 당초 한옥, 바로크 건축물을 전전하다가 지난 1990년이 돼서야 현재의 건물을 지어 자리를 잡았다.

일제가 목포일본영사관을 세우던 시기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던 시기였다. 또한 인천과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영사관을 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은 이전에 세워진 영사관에 비해 상당히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225㎜×103㎜×60㎜ 크기의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장식이 필요한 곳에는 흰색벽돌을 사용하여 미적효과를 도모했다. 입면상의 변화를 위해 1층 창문상부에는 결원아치를 2층에는 반원아치를 틀었다.

목포일본영사관의 또 다른 특징은 정문 외부 진입로이다. 정문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직선도로가 아닌 아亞자형으로 만든 도로를 따라 돌아가야 한다.  


동본원사 목포별원

일제의 조선침탈에서 선봉에 섰던 불교종파로 동본원사와 서본원사가 있다. 당초 두 사원은 ‘본원사’라는 하나의 절이었는데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사원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둘로 나눈 것이다. 동본원사는 부산에 별원을 설치한 이래 각 개항장에 별원을 설치했는데, 인천에는 1884년, 목포에는 1898년에 이를 세웠다.

동본원사는 포교 외에 개항장에서 생활하던 일본인 자녀를 교육하는 소학교와 복지시설도 운영했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목포지역 최초의 일본불교사원으로 현존하는 석조건물은 193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957년 7월 1일 목포중앙교회에서 이 건물을 인수하여 교회로 사용함에 따라 일본불교사원의 당파풍 지붕에 십자가가 걸리는 이색적인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때 철거위기를 맞기도 했던 이 사원은 현재 리모델링을 거쳐 목포시가 운영하는 ‘오거리문화센터’로 쓰이고 있다.

최근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하거나 보수하여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전용하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부족한 지역문화예술공간을 확대한다는 측면과 낡고 용도가 폐기된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현대생활로 끌어들인다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그 건축물의 용도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어느 지자체나 으레 근대건축물은 전시관이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문제가 있다. 건축물과 지역특성에 맞는 용도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 질곡의 역사 속에 탄생한 근대건축물을 우리의 관점에서 재창조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동본원사 목포 별원의 경우 내부를 그대로 두고 전시공간으로 활용해도 좋을 일인데, 전시만을 위한 공간으로 바꾸다보니, 내부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1909년 나주 영산포에서 설립되어 1920년 4월 1일 지점으로 승격되고 이어 목포로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이전 다음 해인 1921년 11월 7일에 세워졌다. 설계자는 나카무라요시헤이中村與資平로 그는 서울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지역의 은행이나 학교건물을 많이 설계했다. 조적조 2층의 이 건물은 외벽을 석판으로 마감하여 얼핏 보면 석조 건물로 보인다. 외벽 1층과 2층 사이의 벽에 있는 양각 문양은 태양을 상징한다. 한편, ‘좌동척 우식산’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과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기관으로 전국 곳곳에 지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세워졌던 동척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부산과 목포 두 군데 뿐이다. 두 곳 모두 보수공사를 거쳐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글·사진 | 손장원  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 인천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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