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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대표 소울푸드, 나주 쇠머리국밥
작성일
2015-11-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617

주 단백질 공급원으로써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쇠고기이며, 부산물인 뼈, 내장, 피 등 부위별 조리법 또한 그 해당부위의 용도에 맞게 발전되고 이용되어 왔다. 쇠머리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고서에서 전한다. 시루에 쪄야 맛이 더 좋고, 혀(우설)는 연하고 구수하며, 코가 총체적으로 진미이며, 눈과 혀의 밑 부위는 별미라 전한다.

 

쇠머리국밥과 쇠머리편육

한 마리의 쇠머리는 대략 25근(1근=600g)정도로, 조리에 앞서 쇠머리를 횡으로 양쪽으로 나누어 하루정도 핏물을 빼야 한다. 핏물을 뺀 쇠머리를 끓는 물에 데친 다음, 데친 물은 버리고 가마솥 큰 것에 물을 새로 붓고 통무 5개 정도를 넣어 3시간 정도 삶다가 건져낸다. 건져낸 쇠머리에서 고기육질은 떼어내고 뼈만 다시 10시간 이상 끓여 내야 한다. 양지나 사태는 같이 넣어 삶아도 무방하지만 우설, 허파, 양은 각각 손질하여 생강, 대파, 무를 같이 넣어 따로 삶아서 사용한다. 그리고 알맞게 삶아진 부위들을 너붓너붓 썰어 소금, 후추, 참기름으로 밑간을 하여 재워놓았다가 넣어 끓이고, 당면도 물에 불려 3~4가닥 넣어주고, 삶은 무와 대파를 넣어 한소끔 끓여내면 된다. 이렇게 완성된 쇠머리국밥을 젓갈무침, 깍두기, 젓갈 넣은 겉절이, 장아찌 등의 밑반찬 상에 낸다.

한편 쇠머리를 무르게 삶아 크게 썰어 편육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살코기를 발라내어 옷감(오양목)에 감싸서 꼭꼭 묶어 찜통에 30분 정도 쪄내, 돌로 눌러 식힌것이 쇠머리편육(우두편육,牛頭片肉)이다. 홍옥이나 막걸리초를 넣은 초장, 토하젓, 겨자장에 찍어 먹는다. 쇠머리편육은 냉장보관하여 여름에 열무김치, 합주(찹쌀로 담근 여름용 막걸리)와 함께하면 주안상으로 최상등품이다.

 

나주 쇠머리국밥의 유래

1940~1950년대, 당시 전라남도 나주시는 영산강 물줄기가 지역주민들의 젖줄 역할을 했다. 화순군에서 강물이 흘러 나주군 남평읍 남석리 드들강으로 흘렀고, 그 폭이 500m정도에 수심은 5m가 넘을 정도였다. 1960년대 광주직할시(현재 광주광역시) 일대와 송정리 미군부대에서 모여드는 인파로 보트장이 형성되고, 사람들의 휴양명소로 유명세를 떨쳤다. 보트장은 토, 일요일에 보트 200~300대가 강에 띄워져 물놀이를 즐겼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 근처 유원지와 강의 인기도를 잘 알만하다. 그 강물이 흘러 나주다리를 거쳐 영산포읍의 해수와 만났고, 그 영산포의 민물장어 또한 유독 크고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긴 강물들이 휘감싸고 있던 남평읍의 마을들이 영산강의 젓줄을 먹고 융성해졌고, 그에 따라 육림뜰로 유명하였으며 5일장 또한 규모가 커지고 유명해졌다. 남평읍의 5일장은 나주시를 기점으로 거리가 남평 10km, 영산포 8km,다시읍 7km, 문평, 동강읍, 금천읍, 봉황면, 공산면, 반남, 영암, 해남, 완도, 장흥, 무안, 14~15개 정도의 읍에서 모여드는 곳이었다.

나주에 형성된 소전 및 가축시장은 남평읍이 첫째로 컸고, 두 번째로 함평장, 세 번째가 영산포의 소전과 가축전이었다. 도축장으로는 나주, 영산포, 남평, 함평 순으로 규모가 컸다. 현재는 영산포장 근처에 도축장으로 당시 도축장들이 통합되어 축협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

01. 전라남도 중서부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영산강. 남평읍의 마을들은 영산강의 젓줄을 먹고 융성해졌으며, 그에 따라 육림들로 유명하였으며 5일장 또한 규모가 커지고 유명해졌다. ⓒ위키백과 02. 핏물을 빼고 끓는 물에 데 친 쇠머리를 통무와 함께 큰 가마솥에 넣고 물을붓고 3시간 정도 삶다가 건 져 낸 다. ⓒ이미지투데이

나주 도축장이 가장 컸 던 이유는 1940년 일제강점기 때부터 당시 중앙정부기관 축산과에서 족보까지 기록, 세세한 관리를 받으며, 축산체계를 양성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축산업 뿐 아니라 잠업계(누에업)도 전국에서 제일이었다고 한다. 이 축산과에서 직접 도축장도 관리하며 도축되어진 우육을 북한을 포함한 전국에 기차로 조달, 운반하였다고 한다. 남한의 소는 짚신을 엮어 신발을 신겼고, 북한의 소는 산악지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말처럼 편자를 박아 다리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상인들은 소의 생산이력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따른 구별법을 얻어 소의 특성을 파악하는데도 정보가 깊어졌을 것이다.

03. 쇠머리편육은 살코기를 발라내어 옷감(오양목)에 감싸서 꼭꼭 묶어 찜통에 30분 정도 쪄내, 돌로 눌러 식힌 음식이다. ⓒ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 04. 나주곰탕. 나주 쇠머리국밥은 그 명맥이 쇠퇴하여 곰탕으로 분립, 발전되어 왔다. ⓒ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 05. 깍두기. 완성된 쇠머리국밥은 깍두기, 겉절이 등과 함께 상에 낸다. ⓒ이미지투데이

한편 1960년대 초에는 나주가 군수물자 거점으로 지정되고 공장이 가동되었다. 나주에서는 육류통조림, 과일통조림, 단무지공장, 호남비료공장이, 제주에서는 어장통조림 공장(꽁치, 고등어통조림)이 가동되었다. 전국에서 이 두 군데만 일본군의 음식 물자를 보급시켰고, 그 물량은 일본의 남양군도, 즉 라오스, 베트남 등 동남아의 일본군 주둔지로 보내졌다. 그 방대하고 엄청난 량의 육류통조림을 만들다 보니 도축장에서 도축되는 소들도 엄청난 량이었던 것이다.

도축된 소의 고기들은 통조림이 되었고 그 부산물은 그 지역에서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는 부산물을 이용하여 국밥이 장터 대표메뉴가 되게 되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 쇠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몽고의 침입 이후로 보고 있으며, 고려 말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0~1950년대 쇠머리국밥은 장터에서 머리, 천엽, 양을 넣고 끓였다고 한다. 당시 무쇠솥에 국밥을 팔팔 끓이다 보면 기름이 상부로 올라오게 되는데 솥뚜껑과 솥에 그 유지가 막을 형성하여 솥 내부의 영양소가 자연히 수증기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쇠머리국밥의 맛의 핵심은 진공에서 오랜 시간 끓여, 어우러져 나온 이 깊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막층 부분도 지역의 관부들끼리만 맛을 볼 수 있는 상미였다고 전한다.

06. 나주에 형성된 소전 및 가축시장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남평 우시장. ⓒ연합콘텐츠 07.찹쌀막걸리. 쇠머리편육은 여름에 찹쌀로 담근 막걸리와 함께 먹으면 주안상으로 최상등품이다. ⓒ이미지투데이

 

나주장터의 대표메뉴

나주장터들의 대표메뉴는 국밥과 비빔밥이었는데, 국밥은 뚝배기에 담아냈으며 비빔밥은 밥을 뱅뱅도리 유기 놋그릇에 담고 신김치는 송송 썰어 국밥에 뜨는 쇠기름을 한 국자 넣어 볶아서 밥 위에 얹었고 그 외에 콩나물, 시금치 무친 것을 얹어내었다고 한다. 이 장터음식들은 깍두기 한 사발과 함께 각 점포에 배달되어 상인들과 보부상들이 노상에서 간편히 식사 한 끼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현재의 쇠머리국밥은 그 명맥이 쇠퇴하여 곰탕으로 분립, 발전되어 왔다. 현대의 요리연구가의 분석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쇠머리국밥은 당시 음식을 만들던 선배들의 엄청난 고심과 연구의 창작물이라 사료된다. 쇠머리국밥은 영양과 맛의 깊이, 대중의 편리성까지 고려된 위대한 음식이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 소울푸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김윤자 (한국의맛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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