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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속에 가려진 대한제국 비운의 왕비
작성일
2015-11-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31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가 시해된 후, 일본이 자신도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고종의 경계심은 극도에 달해있었다. 먹지않겠다. 어서 상을 물리지 못할까! 폐하, 기미나인이 확인했사온데…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새 왕비를 들이라며 고종을 압박했다. 이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여론을 잠재우려는 일본과 친일세력의 계략이었다. 왕실의 왕후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 없사옵니다. 한시바삐 왕후마마를 세우시옵소서.  왕후가 봉변을 당한지 채 닷새가 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경은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하는 것이오? 하지만 대적할 힘이 없었던 고종은 결국 왕비 간택령을 내린다.  누가 간택되든, 왕후로 인정하지 않겠다. 삼간택을 거쳐 새 왕후가 된 인물은 광산 김 씨가문의 한 17세 소녀였다.  명성황후에 이은 고종의 두 번 째 왕후. 하지만 고종은 김씨를 만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은 친미파인 임최수를 은밀히 대전으로 부른다.  전하 간밤에 어인 일로 부르신 것 입니까?   궁에 감금된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던 고종은 왕후봉영 행사를 틈타 궁에서 탈출하기 위한 계략을 세운다.   경들의 뜻대로 왕후를 맞이하도록 하겠소. 다만……    하지만 행사 당일, 친미·친러파 인사들은 새 왕후를 모셔간다는 명분으로 8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지만,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일본군대에 의해 가로막히고 만다.  작전을 도모했던 친미·친러파 인사들은 역모죄로 사형에 처해지고, 김씨 역시 역모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출궁 당하게 되는데…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궁에서 쫓겨난 뒤 20년간 사가에서 외롭게 수절해야 했던 김 씨. 하지만 그녀는 늘자신이 왕비라고 생각했다.  에구머니! 무엄하다! 감히 이 나라의 국모에게 무슨 수작이냐?  괜찮소?  그러던 어느 날 김 씨에게 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친일파 핵심 인사인 윤덕영이 찾아온 것이다.  왕후마마, 궁으로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윤덕영은 고종황제가 순종의 일왕배알을 거부하자, 고종황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군주를 배알하다니, 이는 하늘의 법도를 무시하는 일이다.  평생 폐하만 바라보며 수절하고 있는 여인을 돌보지 않는 것 또한 법도를 어기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윤덕영의 줄기찬 요구에 고종황제는 김씨의 입궁을 허락했고, 김씨는 드디어 1917년 5월 다시 궁에 들어온다.    하지만 고종황제는 그녀의 알현조차 거부했고, 그녀는 정화당이라는 존칭만을 얻고 궁궐 구석의 작은 방한칸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인 1919 1월 21일. 정화당 김씨는 고종이 승하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전에 들 수 있었다.  일본은고종의죽음을감추기 위해모두에게울지 못하도록 위협했지만 정화당만은 개의치 않고 서럽게 통곡했다.  곡을 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흑흑흑…  이후 궁에서 나온 정화당 김씨는 가난한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으며, 현재 서삼릉 경내 조선 왕들의 후궁묘에 그녀의 무덤이마련돼있다.

글·그림. 유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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