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만권의 책을 포개 놓은 듯, 세월과 파도가 새긴 절경. 부안 채석강彩石江, 적벽강赤壁江
- 작성일
- 2015-09-01
- 작성자
- 문화재청
- 조회수
- 3942
바닷가에 서있는 만권의 책, 채석강
훅~ 더운 기운이 코끝을 스치니 비릿한 바다냄새가 난다. 격포해수욕장, 마음까지 탁 트이는 시원한 바다 위로 물살을 가르며 모터보트가 달리고 있다. 한 더위는 지났다지만 아직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초가을, 피서객들이 떠나고 난 해수욕장이지만 절경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바닷가를 따라 조금 걸으니 그 뒤로 보이는 채석강 퇴적암. 면적만 총 12만 7327m2라더니 그 거대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침 썰물 때라 채석강의 너른 바윗돌을 볼 수 있었다. 바닷물이 빠지고 난 바위위를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바다생명체들. 게며 따개비, 말미잘, 불가사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그 모습이 신기한 듯 눈을 뗄 줄 모른다. 바위 위에 시간과 바닷물이 새겨낸 기하학적 무늬들. 갑골문자를 보듯 낯설다.
누구는 바닷가에 세워진 만권의 책이라고도 했고 누구는 빗으로 빗어 놓은 것 같다고도 하겠지만 이 퇴적층은 바다와 바람만으로 빚어진 해식절벽이다.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감히 따져볼 수조차 없이 까마득한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만들어진 지형인 것이다. 그 퇴적층이 바람에 깎이고 바다에 침식되면서 오늘날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채석강이 더욱 특별한 이유
퇴적암이 빚어내는 절경은 우리나라에 태종대와 우항리 등여러 곳 존재하지만 모두 채석강처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절벽 사암 사이에 모난 돌로 이뤄진 역암층은 다른 퇴적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란다. 지질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학술적인 가치도 대단할 것 같다.
낙석주의라 쓰여 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채석강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구경한다.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 거대한 바위 위 점들처럼 보일 것 같다. 닭이봉 위를 올려다보니 작은 전망대가 보인다. 격포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내려다보고 싶은 욕심에 쉬엄쉬엄 전망대에 오른다. 20여분이나 올랐을까? 항구의 모습을 갖춘 격포와 넓은 해수욕장, U자 형의 포근한 지형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살랑 살랑 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있었다.
시인묵객이 아니라도 머물고만 싶은 적벽
닭이봉에서 내려온 후 적벽강까지 다시 길을 잡아본다. 서해안에서 가장 돌출된 곳, 그래서 변산반도의 최서단,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전라 우수영 관하 격포진을 이곳에 두기도 했다. 격포해수욕장을 지나 후박나무 군락이 있는 연안을 거쳐 수성당이 있는 용두산을 돌아 대마골·여울굴까지 감도는 2km의 해안선. 이 해안선이 채석강에서 적벽강에 이르는 명승 제13호다. 채석강의 이름을 따라 한 것일까?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던 적벽강만큼 경치가 좋다하여 이곳 이름도 적벽강이란다. 2km 남짓한 이 해안선은 다양한 암벽은 물론이고 후박나무 군락 등 상록활엽수 식생이 형성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걸을 거리도 아니었지만 게으른 마음에 차로 가기로 한다.
적벽강을 목적지로 20여 분이나 달렸을까? 너른 들판이 먼저 나서더니 수성당 안내문이 먼저 우리를 맞는다. 빨간 튜울립과 유채꽃밭을 뒤로 하고 간 곳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에 바다의 신, 개양할머니를 향해 마을 공동 제사를 지낸다는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개양할머니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어부를 보호하고 고기를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냈던 유물을 발견하기도 해 죽막동 제사유적지로도 전해진다. 제를 지내는 곳이라선지 곳곳에서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역력하다. 촛불이 켜져 있고 앞에 정성들여 쌓은 돌탑이 서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바다로 내보내는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세상 온갖 것에 절하여서라도 안녕을 빌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 앞에 서서 어부와 그 가족들의 마음을 상상해보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오늘날에도 바다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치열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부지런히 부안 마실길 3코스를 걸어 적벽에 이르니 채석강 못지않게 웅장한 적벽강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생김새가 사자를 닮았다는 사자바위를 중심으로 좌우 약 2km에 이르는 적벽강이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몽돌해안 관찰지라는 팻말을 따라 해안을 걷는다. 이곳에 층리만큼이나 유명하다는 해식동굴, 채석강에는 유니콘 해식동굴이 있다고 하는데 적벽에서는 물방울무늬 동굴을 발견했다. 유니콘 모습 사진이라도 찍어 왔어야 했는데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사자바위 뒤로 언뜻 붉은색을 띤 듯한 황토빛 바위지대가 보인다. 저기가 적벽인가? 발밑으로 물에 씻긴 듯 예쁜 몽돌들이 보인다. 그 위를 지나 너른 바위 위로 주상절리와 신기한 지형들이 끊임없이 서있다. 붉은 노을이 비치면 바위가 진홍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는 적벽강. 바다의 하늘이 붉은 빛으로 타오를 때까지 시간은 좀 남았다. 그런들 어떠하리. 변산해변의 풍경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천혜의 절경인 것을. 해안길로 안내하는 산책로에 기대어 보온통에 타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붉은 하늘빛이 연출할 또 하나 적벽의 모습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글. 신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