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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체성이 살아있는 가구, 자존심을 지켜가는 사람
작성일
2015-08-0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349

정체성이 살아있는 가구, 자존심을 지켜가는 사람. 가구디자이너 진홍범. 꿈이 뭔지 잘 몰랐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른 채 치른 대입시험. 그는 네 번이나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정말 공부하고 깨우쳐야 할 게 뭔지 알게 됐다. 변화의 단초가 된 건 한 권의 책이었다. 입시고 뭐고 ‘책이나보자’는 생각으로 짚어든 책, 『 나의문화유산답사기』는 방황하던 그에게 등불이 되어 주었다. 우리 고건축에 매료된 그는 책에서 보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차, 직접 답사를 다니며 꿈을 키웠다. 그로부터 20년, 지금의 진홍범은 가구디자이너다. 건축에서 가구로 대상은 달라졌지만 그가 짓는 궁극적인 실체는 변함없다. 20대에 탐닉했던 오래된 아름다움,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재현’하고 ‘재생’시키는 것 말이다.

 

정겨운 목공소, 아늑한 서재

서울 신당동에 위치한 진홍범목공소. 큰길에서 좀 떨어진 골목인데도 지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앞에서 한동안 지켜보니 오가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목공소를 유심히 보는 눈치였다. 게다가 수레를 끌고 가던 노인은 아예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가고, 한 중년남자는 신문을 읽으며 한참 시간을 보낸다. 좀 의아한 건 주인에게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냥 앉았다 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벤치 옆 에 세워있는 ‘우리 골목길 쉼터’라고 쓴 팻말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동네 구경, 사람 구경 실컷 하는 동안 진홍범 씨는 하던 작업을 마무리했다. 10여분 뒤 그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지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전시회에 냈던 작품들과 그의 책상, 그리고 작은 서가書架가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는 매일 하루일과를 마치고 이곳에 내려와 책을 읽는다. 책은 지금도 그에게 ‘등불’같은 존재. 역사, 미술, 사회, 철학…학교에서 다 배울 수 없는 지식들을 가르쳐준다.

02.‘ Side-Division 2011’. 진홍범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가구의 특징인 면분할의 미를 표현했다. ⓒ진홍범

 

소박한 시작, 진중한 뜻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잘 생긴 테이블에 마주앉은 진홍범 작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시작은 작가가 아니라 평범한 목공방 주인이었어요. 파주의 어느 공동묘지 속에서 작업장을 시작했죠. 조용한 곳에서 외로운 작업을 하다 보니 목표의식이 분명해지더군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부동산회사에 들어갔지만 늘 가슴 한구석에 20대의 꿈이 남아있었다. 목공을 시작한 건 10년 전쯤. 나무의 느낌이 좋았다.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일 이 즐거웠다. 그에게 늦었다는 것은 못 넘을 장애물이 아니었다. 단돈 500만원에 점포를 얻어 가구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자리가 나빠도 직장에 다니며 쌓은 영업력으로 커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놀더라도 어떻게 노느냐가 중요하잖아요. 주문하는 사람도 없으니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었죠. 작품가구를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어요. 시간이 남아도니 열심히 만들었구요. 그런데 어느 날은 헤이리 예술인마을의 조규석 선생님께서 액자제작을 맡기러 와서는 작품들을 보시더니 제 작품들을 자기 갤러리에다 전시해보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때까진 제가 만든 걸 작품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죠.” 가구가 아닌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긴 시점이었다.

03. ‘몇 년 쓰다 버리는 가구가 아니라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가구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진홍범 작가. 그는 면분할과 짜맞춤이라는 우리 가구 디자인의 요체를 지켜나가고 싶다. ⓒ김병구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9년 겨울, 그는 인사동 공평미술관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보다 듣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사람들에게 작품을 평가받고 싶었다.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스터까지 손수 붙여가며 준비한 전시회. 하지만 정작 전시기간에는 전시장에 가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장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거예요. 정말 아쉬웠죠. 그런데 제 맘을 알았는지 아내가 전시회를 다시 해보라더군요. 정말 고마웠죠. 칼을 가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2011년 봄,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한 두 번째 전시회. 그는 그 시점이 비로소 작가의 길에 들어선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 것을 제대로 보여주자’는, 작가로서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04. ‘진홍범의반닫이2014’. 전통의 가치는 지키되 디자인 은새로워야 한다. 진홍범 작가는 지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디자이너이다. ⓒ진홍범 05. ‘Korean Roof’. 진홍범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의자의 좌판은 삼국시대 도기의 곡선을 재해석한 것이다. roof의 뜻은 지붕이 아니다. 높은 곳, 작가의 의지이자 다짐이다. ⓒ진홍범

 

한국의 정체성, 재해석과 창조

그런 만큼 ‘Side-Division 2011’은 그에게 각별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가구의 특징인 면분할의 미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면분할이라는 방식이 발전하게 된데는 조상들의 나무를 다루는 기능적, 미적인 지혜로움이 담겨있어요. 계절에 따른 온도와 습도 차이를 극복하고자 고안된 방법 이었죠. 하지만 그냥 나누지 않고 아름다움을 고려해서 나눴죠.” 현대가구는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적인 장식미를 배제하고 군더더기 없는 비례미와 조형미, 그리고 재료가 가진 순수함을 잘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점에서 ‘Side Division 2011’은 이 시대에 맞는 목가구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나무 눈매에서 나타나는 질감이 있어요. 사람 피부처럼 숨구멍이 있죠. 대량생산된 가구는 전부 도장을 해서 나무가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거기다 못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죠. 습도가 높아지면 못은 바스러져 버리지만 나무를 짜 맞춰서 이으면 나무조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힘을 상쇄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가죠. 몇 년 쓰다 버리는 가구가 아니라 대를 이 어 물려줄 수 있는 가구, 물려주고 싶은 가구를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부터 가구는 공예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존재했다. 전통이 사라지고 정체성도 끊어져버렸다. “할아버지는 있는데 아버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우리 가구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어요. 단절됐던 한국의 고유성을 우리 대에서 되살려야 해요.” 물론 개선해야할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재료의 다양화와 타 분야와의 결합도 그 중 하나이다. 진홍범 작가는 이러한 변화는 바람직한 움직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디자인의 맥락을 이해하고 디자인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함을 강조한다.

디자인에는 그민족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그 고유함은 그 나라 문화의 자존심이다. 06. ‘악어개구리’. 조상들의 해학과 재치는 그에게 또 하나의 영감을 준다. ⓒ진홍범

“옛것을 그대로 옮기면 답습이자 카피지만,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창조하는 일은 매우 신나는 전통입니다. 내가 하는 작업이 이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좋아해서 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에는 그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그 고유함은 그 나라 문화의 자존심이다. 진홍범 작가는 ‘한국의 가구디자이너’이자 ‘목수’이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는 목수가 되려 한다.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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