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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답안지에 그림을 그려낸 당돌한 청년 연암 박지원
작성일
2015-07-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446

1792년(정조 16년) 정월, 안의현(경남 함양지역)은 새로 부임하는 현감 맞을 준비로 온 마을이 들썩거렸다. 사또 행차라면 동구 밖에서부터 나팔을 불고 시끌벅적 난리가 났을 텐데, 난리는커녕 웬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홀연히 마을을 찾았다. '얘야, 안의현 관아가 어디냐?' '예, 저쪽 대밭산 밑인데요?' '그럼, 네가 날 그리로 안내해다오.' '전 지금 사또 상에 올릴 떡 가지러 심부름 가는 길이라……' '그런 음식 장만은 안 해도 되니, 그냥 돌아가자꾸나.' '저 노인을 모시고 오느라 심부름도 잊었단 말이냐?' '아이는 꾸짖지 마시게, 내가 바로 이 고을의 현감으로 온 박지원일세.' 이 초라한 행색의 노인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그리고 소설가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행동으로 이단아로 불렸다. '……' 박지원은 비록 집안형편은 어려웠지만 노론집안의 자제로서 탄탄한 앞길이 열려있었다. 게다가 일찌감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그의 출세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역 시!' '대단하구만!' '저 어린 아이가 이 시를 지은게 분명한가?' '허허, 범상치 않군 그래.' 영조 46년 열린 1차 소과시험에 참가한 24살의 박지원은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장원급제로도 부족할 만큼 탁월한 문장실력이로구나.' 영조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치른 2차 시험. '이게 뭐지?' '답안지가?' 황당하게도 그가 낸 답안지에는 답 대신 고목이나 바위 등이 그려져 있었다. 급기야 이후로는 더 이상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않고 집필에만 전념한다. 출세가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작가의 길을 선택한 박지원은『양반전』,『허생전』등을 통해 양반들의 위선과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5개월에 걸쳐청나라를견문하고돌아와북학론을개진한역작 『열하일기』를 남겼다. 훗날 박지원은 50세에 벼슬길에 나아가 종9품 말단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뒤늦게 관료가된 이유는 생계를 잇기 위함도 있었지만, 청나라에서 보고 온 것들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실제로 그는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면서 수레, 벽돌굽기, 물레방아 등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만들어낸다. 많은 양반들이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할 때 박지원은 그가 추구해온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직접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글. 그림. 유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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