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겸양지덕의 대명사 고불맹사성孟思誠
작성일
2015-04-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622

고불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대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조선시대 명재상 중의 명재상이었다. 맹사성하면 으레 그의 효행과 더불어 청렴과 겸양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재상이라 불려왔던 것도 그의 성품, 특히 겸양지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맹사성은 최고의 정치가이면서 시조 문학가이다. 이시대 에 맹사성의 청렴과 겸양에 대해 한번 성찰해보는 것은 현시대 우리의 삶에 큰 의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맹사성의 청렴과 겸양지덕을 그의 치적과 함께 조명해본다.

청렴한 삶

맹사성(孟思誠, 1359~1438)은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 호는 고불이다. 그는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며,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 없이 절의를 지켰다. 맹사성은 우왕 12년에 문과에 급제, 조선조에 들어와 대사헌, 판서를 거쳐 좌의정으로 세종 17년(1435)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조선조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희, 이원익 등과 함께 청백리에 올랐다.

맹사성이 살았던 옛 집, 맹씨 행단(사적 109호)에 가보면 그가 청백리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있다. 8년이나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고불의 집은 빗물이 새고 세간은 볼품이 없었다.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소를 타고 다녀 백성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하루는 판서가 맹사성의 집을 찾았다. 마침 소낙비가 쏟아졌다. 낡은 집인데다 물벼락까지 맞았으니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새나왔다. 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먕사성은 빗물을 피 해 앉으면서 구시렁거렸다. “하필 손님 계실때 소낙비가 쏟아질게 뭐람.” 이 때 판서는 자기집에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판서는“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라며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다.

맹사성은 관에서 주는 녹미 외에는 먹지 않았다. 하루는 밥맛이 달라 아내에게 말했다. “이보오, 녹미는 아닌 듯한데 어디서 구해온 쌀이오?” 그러자 아내는 “오래 묵어 차마 먹을 수 없기에 이웃집에서 빌렸습니다.” 라고대답했다. “허허, 벼슬아치가 녹을 먹는것은 당연한 일, 이후엔 그리하지 마시오.” 이처럼 일국의 정승임에도 그는 평생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01. 구괴정九槐亭. 아산 맹씨 행단 뒤편에 서있는 정자로 맹사성이 황희, 권진 등 재상들과 우의를 다지는 뜻에서 느티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정사를 논했다고 전한다. ⓒ신웅순 02. 고불 맹사성시조비. 비석하단에 맹사성의「강호사시가」원문이 새겨져 있다. ⓒ신웅순 03.「강호사시가」의 배경인 배방면 중리 앞을 흐르는 금곡천. ⓒ신웅순

겸양한 삶

청렴한 삶도 삶이려니와 그를 명재상으로 만든 것은 겸양지덕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의 예를갖추고 반드시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였다. 들어와서는 맨 윗자리 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는 공손하게 배웅했다. 그리고 손님이말을 탄 뒤 에 야 비로소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겸손했다.

맹사성이 처음부터 그토록 겸손했던 것은 아니다. 맹사성이 장원급제하여 지방의 군수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근처의 무명 선사를 찾아 스님에게 질문했다. “스님, 이 고을수장으로 제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 보오?” 그러자 스님은 “착한일 많이 하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에 맹사성은 “아니,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이런말을 들으려고 찾아온것은 아니외다.”라며 버럭 화를 냈다. “녹차나 한 잔 하고 가시구려.” 그는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스님은 찻잔이 넘치는데도 계속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다 젖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치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찻물이 넘 쳐 방바닥을 적시는것은 아시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시오.”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방문을 나서다 문틀에 그만‘쿵’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 이 없지요.” 머리를 한 대 더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겸양지덕을 맹사성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명재상이 될 수 있었다.

04. 전세 맹고불 유물(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 유품들 가운데 옥적과 도장에 새긴 시문구 등은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었던 맹사성 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문화재청 05.아산 맹씨 행단(사적 제109호). 고불 맹사성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문화재청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에 내려갔다 상경하던 도중이었다. 용인에서 비를 만나 허름한 어느 주막에 들렀다. 과객 하나가 누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선비는 비에 젖은 허술한 맹사성의 차림새를 보았다. 이런 저런 얘기로 둘은 서로 친해졌다. 선비는 이 노인을 놀릴 양으로 공당公堂놀이나 하자고 했다. 맹사성이 묻고 청년이 대답하기로 했다. “무엇하러 한양에는 올라가는公?”, “과거시험 보려고 갑니堂”, “내가 시켜줄公?”, “그러지 못할 것이堂” 선비는 노인이 과거시험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하겠냐는 듯 비아냥거렸다.

비가 그쳐 각자 제갈길로 떠났다. 과거시험이 끝났다. 면접관 맹사성과 선비가 마주 앉았다. 맹사성은 이미 선비가 합격한 줄을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公?” 깜짝 놀라 선비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얼떨결에 말을 받았다. “죽을죄를지었습니堂.” 맹사성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길가 거렁뱅이 견공에게서라도 항상 배울 것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 이 공인의 길임을 명심하시게나.” 겸손도 겸손이지만 정승의 말과 행실은 이렇게 소탈하고 소박했다.

06. 맹사성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 봉분 앞에는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으며 봉분의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문화재청

강호사시가에 깃든 겸양지덕

맹사성은 음률에도 밝았다. 풍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영의정 하륜이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왕께 건의할 정도였다. 피리 소리가 들리면 맹사성이 집에 있다는 표시였다. 언제나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키면 한 곡조씩 불렀다.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다.

그가 우의정 재임시 『태종실록』편찬 감관사로서 감수한 일이 있었다. 『태종실록』이 편찬되자세종이한번보자고했다. “왕이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되어 사관이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가하옵니다.” 세종은 그의 말을 따랐다. 품성은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정사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맹사성은 고택에 살면서 아름다운 「강호사시가」4수를 지었다. 이것 이 우리나라 최초의 연 단시조(연이어진 독립된 단시조)이 며 훗날 강호시가의 원지류가 되었다. 맹씨 행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만년에 지은 시조로 추정된다.「강호사시가」첫 수는이렇게 시작된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 탁료계변濁溪邊에 금린어錦鱗魚안주로다 / 이 몸이 한가로움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대자연 속에 봄이 돌아오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 시냇가에 탁주, 안주는 쏘가리로다 / 이 몸이 한가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자연에 몸을 맡기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청렴과 겸양지덕의 정신 이 없었다면 이런 시조를 지을 수 있었을까 싶다.

일생을 청렴하게 살았고 겸양지덕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맹사성. 그는 진정 재상다운 재상이었다. 재상은 마음과 영혼이 깨끗해야한다. 물욕이 영혼을 망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세심정혼洗沁淨魂의 정치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글. 신웅순 (중부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