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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폭의 서화書畵같은 풍경 고매한 예술혼이 깃들다
작성일
2015-02-1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203

‘진도는 정이 붙는 섬이더라. 진도는 정이 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더라. 진도는 정이 흐르는 흙이요, 물이요, 산이요, 들이요, 개울이요, 집들이요, 마을들이요, 농토들이요, 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싸인 섬이더라.’ 시인 조병화가‘정이 넘치는 섬’이라 노래한 진도. 긴 겨울의 끝자락에 찾아간 그 섬은 한 발 먼저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퍽 부드러운 바닷바람과 풋기가 감도는 보리밭, 입춘을 앞두고 한해 농사준비에 바쁜 주민들의 생기어린 얼굴에도 봄이 가까이 와있었다.

 

감격이 물결치는 울돌목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한반도 서남쪽 바다에 자리한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하지만 육지와 다리로 이어져있고, 다리를 지나 섬에 들어서면 나지막한 산과 구릉, 너른 논밭이 펼쳐져 있어 정작 진도 안에선 섬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진도는 분명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유배지였고,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진 서울에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진도의 관문, 진도대교가 먼 길 달려온 여행객을 제일 먼저 만난다. 1984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우리나라 해역에서 조류가 가장 심한 울돌목에 놓여있다. 울돌목은 진도와 해남 사이의 병목처럼 갑자기 좁아지는 해로인데, 많은 양의 바닷물이 일시에 이곳을 지나가는 간조와 만조 때는 물살이 더욱 거칠다. 그래서 이름도 ‘굉음을 내며 흐르는 바다’ 라는 뜻의 울돌목. 그 의미를 확인시키듯 파도가 금방이라도 다리를 덮칠 기세로 맹렬하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업의 현장이다. 조선 선조 30년(1597),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선 133척을 맞아 12척의 병선으로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격퇴시켰다. 10배 이상의 왜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데에는 울돌목의 거센 조류가 큰 역할을 했다. 전투 당시 북서쪽으로 흐르던 해류가 남동쪽으로 바뀌면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준 것. 그 결과 조선은 해상권을 되찾았고,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대승으로 기록됐다. 진도대교를 건너는 동안 그날 울돌목에 울렸던 승전의 함성을 상상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진도대교 인근의 벽파항 언덕으로 올라갔다. 명량해전의 현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이충무공전첩비(진도향토유형유산 제5호)가 당당히 서있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당시 숨진 군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진도 도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높이 11m, 무게 9톤에 이르는 이 비석은 국내 곳곳에 세워진 이순신 비석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규모도 규모지만 비석 위쪽에 세심하게 새겨 넣은 용 문양과 큼지막한 거북 받침대도 인상적이다. 비석 곁에 서서 진도를 둘러싼 바다를 바라봤다.다도해는 감청색의 어두운 바다였다. 그 엄숙하고도 처연한 물결 위에 흩뿌려져 있는 진도의 섬들은 조도군도를 비롯해 모두 235개. 가사도, 주지도, 양덕도 등 섬들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이 황홀하다. 그 풍경에 사로잡혀 한참 넋을 놓고 서 있었다.

01. 벽파항 언덕에 서있는 이충무공전첩비.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당시 숨진 군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진도 도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02. 진도대교와 울돌목. 우리나라 해역에서 조류가 가장 심한 곳이자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업의 현장이다.

 

소치의 삶과 예술혼이 깃든 집

누군가 노래하기를, 진도는 애잔하게 아름다운 섬이라고 했다. 첨찰산 품에 안겨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호)에 가보면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운림산방은 남도 예술의 거목이라 불리는 소치 허련(許鍊, 1809〜1892)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이후 5대에 거쳐 오늘날까지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장대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 자랑을 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데 첫째는 글씨, 둘째는 그림, 마지막으로 노래 가락이다. 그중 두 가지가 이곳 운림산방에서 비롯됐다. 크고 작은 봉우리에 둘러싸인 산골,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운무雲霧에 잠겨있는 그 집의 전경은 고즈넉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깊이를 갖고 있었다. 먹과 붓으로 마지막 창작의 혼을 쏟았던 소치의 생의 뒤안길이 오버랩 되기 때문일 것이다.

『소치실록』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仙境으로 꾸몄다’ 고 한다.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소치는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을 ‘운림각雲林閣’ 이라고 지었다. 막돌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ㄷ자형 구조로 3칸은 화실, 나머지는 살림이다. 안채는 一자형 초가로 왼쪽부터 방, 부엌, 안방, 윗방, 광을 배치했으며,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초가로 왼쪽 끝 방은 안채와 오갈 수 있는 통로로 만들었다.

마당에는 운림지雲林池라는 연못이 있다. 수련 잎이 뒤덮은 연못에는 오리와 잉어들이 노닐고, 한가운데 작고 둥근 섬에는 기품 있는 자태의 배롱나무가 수면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연못 둘레에는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는 의젓한 노송과 잣나무, 매화나무, 버드나무 등 갖가지 수목들이 둘러서있다.

03. 남도 예술의 거목이라 불리는 소치 허련이 말년을 보낸 운림산방. 마당에는 운림지라는 연못이 있다.

 

감상과 사유 이상의 울림

운림산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잡념이 사라지는 듯 했다. 소치가 바랐던 대로 신선神仙이 머무를 만큼 신비스럽고 그윽한 정취이다. 소치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이 집을 지었을 것이다.

‘운림산방 한쪽에는 소치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소치 허련, 미산 허영, 남농 허건, 임전 허문까지 4대에 걸친 허씨 가문의 작품(복제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초연히 남종화에 전념했던 소치의 고매한 정신과 그 맥을 잇기 위해 후손들이 쏟았을 인고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전시관까지 다녀온 뒤 한 번 더 운림지를 빙 돌아보고는 대문 쪽으로 향했다. 대문 곁에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손톱만한 봉우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봄을 깨우는 꽃, 동백이었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예부터 고고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동백. 그 꽃망울은 뇌리 속 운림산방이라는 산수화에 선홍빛 방점을 남겼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치 허련의 생애처럼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여행이었다.

 

글 성혜경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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