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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방 한 치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크고 깊은 마음을 새기다
작성일
2015-01-0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721

사방 한 치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크고 깊은 마음을 새기다. 새김아티스트 고암 정병례. 서예가 붓에 먹을 찍어 종이 위에 문자를 쓰는 예술이라면, 전각은 칼로 나무·돌·금옥金玉등에 문자를 조각하는 예술이다. 문자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서예가 평면적 회화예술이라면 전각은 입체적 조형예술이다. 차이는 또 있다. 서예의 종이는 크기에 제한이 없지만 전각은 기껏 가로 세로 한 치 안팎의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고암古岩정병례 화백은 전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회화와 조형을 아우르는 제3의 예술로 재탄생시킨 인물이다. 전각의 발상지인 중국을 비롯해, 대만, 일본 등 어느 나라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장르다. 01. 전통전각을 바탕으로 확대와 강조, 색채를 통해‘새김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정병례 화백.

공과 색, 허와 실, 무와 유를 아우르는 새로운 장르

글자인 듯 그림인 듯, 한 번 보고는 무엇을 나타낸 건지 알 수가 없다. 여러 개의 네모 안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 아니면 그림이 들어있다. 꽃도 있고, 새도 있고, 물고기, 나뭇잎도 있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서서 집중하고 보면 ‘봄의 속삭임’ 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전각의 물리적, 표현적 틀을 깨고 새김아트를 창시한 고암 정병례 화백의 작품이다.

“전각은 작은 세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서예에서 쓰는 낙관이나 인보印譜등을 만드는 작업이지요. 이름이나 호를 파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 작은 세계를 넘어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 한 색, 다양한 크기의 전각을 만들어 보고 싶더군요.”

전각에는 본래 초목조충草木鳥蟲 따위를 새기는 초형인肖形印이라는 분야가 있다. 정병례 화백은 이것을 확대하고, 강조하고, 색채를 입히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새김아트로 명명한 이 새로운 장르의 작품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심오하다.

문자와 그림을 아우르고, 물질과 정신, 비추상과 추상이 뒤섞여 있다.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인외구인印外求印’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전각밖에서 전각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일 것이다.

“글자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라면 그 밖의 배경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의미합니다.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돼요. 작가의 정신과 철학을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읽히기보단 디자인으로 보이기를 바라고 만든 거니까요.” 정신을 배제한 예술은 단순한 기술 이상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물질만을 볼 때 예술가는 마음의 향기, 생각의 색깔, 인생의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는 정화백. 그는 ‘예술기술자’ 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로 철학적 사유에 온 힘을 쏟았다.

그렇다고 오로지 마음에만 치중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작품 속에 공과 색, 허와 실, 무와 유를 절묘하게 담아낸다. 정신과 물질이 공존한다.

02. 누구도 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 최초의 작업이기에 도구까지도 스스로 만들어 쓴다. 03. 진도아리랑을 모티프로 한 작품. 작은 돌 안에 진도아리랑의 가사와 그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 촘촘히 조각돼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험한 길

그는 예술에 대한 뚜렷한 소신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 학연도 혈연도 없던 그의 새로운 행보에는 ‘정통성’ 이 없다는 비난이 늘 따라다녔다. ‘인주 는 오로지 빨강색’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방색과 금박, 은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그의 작품을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오랫 동안 가장 전통적인 전각을 해왔습니다. 전통에 해박해진 뒤에야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남들과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집중했지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찾고 그것들의 방식을 고민하는 작업을 계속하다 정명경 선생님을 만나 전통적인 전각 기법의 기본부터 배웠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30대 후반이었죠. 기본기를 익히자 눈이 뜨이더라고요. 그제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타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지요.” 정 화백은 10년간 독학으로 각법을 터득하며 전서篆書를 익혔고, 회정 정문경 선생 밑에서 10여 년간 수련을 거쳤다. 스승으로부터 정식으로 전각을 배 우면서 독학 시절에 품었던 의문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창조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흑백과 빨간색에 한정됐던 전각에 화려한 오방색을 입히고,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도 새겼다. 마침내 마흔 둘에 첫 전시회를 열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해, 3년 만에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서예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고, 2011년 한양대박물관에서 열린 ‘전각예술의 현대적 변용과 활용’ 이라는 전시를 통해  ‘새김아티스트’ 로 확실한 도장을 찍었다.

04. 전통 전각예술을 문자와 디자인을 조합해 재해석한 정병례 화백의 새김아트 작품들. 문자와 그림,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들이 작품 안에 어우러져 있다. 05.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정병례 화백의 작업실이자 전시실인‘새김아트’

진정한 가치를 따라가는 장도壯途의 여정

물론 그 후에도 비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정 화백은 예술계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대중을 전통예술 세계로 이끌어 들이려면 대중성과 현대성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합니다. 과거의 예술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보다는 현대의 새 패러다임을 새겨 넣는 게 진정한 전통계승이라고 생각하죠.”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중심이 되고, 과거의 비정통이 후대에 정통이 된다.

그는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통은 결국 ‘나’ 자신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곧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을 모티브로 한다고 해서 표현방식까지 한국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옛것을 옛 모습 그대로 재생시키는 건 장인의 몫이지 예술 가의 몫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고 현대화에만 치중해 전통은 다 버리자는 것도 아닙니다. 담는 그릇은 변해도 그 안에 담기는 본질은 지켜가야 합니다.”

전통이라고 해서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병례 화백. 전각의 전통성, 우리 역사와 문화에 담긴 철학을 21세기적인 새로운 그릇에 담는 것, 이것이 바로 정 화백의 새김아트다.

06. 그의 작품에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가 공존한다. 07. 전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회화와 조형을 아우르는 제3의 예술로 재탄생시킨 다양한 작품들.

“한글로만 작업을 할 생각이에요. 빛은 색으로 나타나지만 소리는 공간적인 개념이라 보이지가 않죠. 저는 그 소리를 보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이용해 작품에 소리를 만든거예요. 그러니 제 작품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함께 있는 거지요. 한자는 상형문자여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쉬운 반면, 한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계속 글자와 공간의 관계를 고민해야 하죠. 저는 사람들이 한글이 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정신을 보았으면 합니다. 영원한 행복은 외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잖아요.”

장기적 안목으로 시작했고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왔다. 지금도 정병례 화백의 예술세계는 그 진정한 가치를 따라가는 장도壯途의 여정을 지나고 있다. 쉽지만은 않겠 지만 온전히 작품만으로 그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글 박세란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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