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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녀, 시집가다
작성일
2014-04-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3237

왕녀, 시집가다
덕온공주 하가 때 사용된 원삼(중요민속문화재 제211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왕녀의 혼례는 관련자들, 즉 종친과 부마(駙馬, 왕의 사위) 가문 사람들 위주로 거행되었다. 부마 가문 사람들은 사가 사람들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은 왕녀의 혼례에 사용된 혼수품, 음식 등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왕녀의 혼례는 조선양반 중 상층 양반의 혼례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다시 중하류의 양반층 등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왕실의 혼례, 그 중에서도 왕녀의 혼례가 남다른 이유이다.

 

왕의 금지옥엽

조선시대 왕녀는 생모가 왕비이면 공주, 후궁이면 옹주로 불렸다. 공주와 옹주는 비록 생모의 신분은 달랐지만 왕의 딸이었기에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 하였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실제 왕의 삶을 살았던 왕은 27명이었다. 또한 실제로 왕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죽은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이들도 5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500년간 모두 32명의 왕이 있었고, 이들에게서 공주 38명과 옹주 78명 합 116명의 딸들, 즉 금지옥엽이 태어났다.

공주와 옹주는 혼인 후 출궁하기 전까지는 궁궐에서 생모와 함께 살았다. 왕비와 후궁이 공주와 옹주를 낳으면 양육은 신하들이 맡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유모였다. 예컨대 공주가 갓 태어나면 한 달 정도만 왕비가 젖을 주고 그 뒤로는 유모가 젖을 먹였다. 그 기간은 보통 2~3년 정도였다. 그 이외에 보모상궁은 공주를 재우고 씻기는 일, 책을 읽어 주는 일 등을 책임졌다.

반면 궁녀는 기저귀를 갈거나 이부자리를 빨고 갈아주는 일, 또는 방 청소 등을 맡았다. 공주가 조금 자라면 같이 놀아 주기도 했다. 환관도 보모상궁이나 궁녀만큼은 아니지만 어린 공주 옆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공주를 모시고 외출하거나 공주의 방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 등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공주와 옹주는 태어난 직후에는 아기씨라 불리다가 6~7살 쯤 되어 공주 또는 옹주에 봉작되었고 10살 전후로 혼례를 치렀다. 공주와 옹주는 혼인 후에도 계속 궁궐에서 살다가 성년인 16살 쯤 출궁하여 남편과 살았다.

 

왕녀의 하가(下嫁)

혼례는 근본적으로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일이다. 그런데 남녀의 만남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꽃과 같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남녀의 만남을 포기할 수는 없다. 불꽃처럼 강렬한 남녀의 만남을 안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자는 남녀의 만남이 예법으로 다스려지고 통제될 때만이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의 결정체가 ‘유교 혼례’였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실은 유교 혼례를 솔선수범했다. 조선시대 왕녀의 혼례는 ‘왕녀하가의(王女下嫁儀)’라고 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왕녀하가의는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동뢰(同牢), 부현구고(婦見舅姑), 부현사당(婦見祠堂)으로 구성되었다. 납채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 약정서를 보내는 절차였고, 납폐는 혼인이 약정된 후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폐백을 보내는 절차였다. 친영과 동뢰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첫날밤을 보내는 절차였고, 부현구고는 첫날밤을 치른 신부가 아침에 시부모를 뵙고 음식상을 올리는 절차였다. 부현사당은 시집온 신부가 사흘 만에 시부모의 사당에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조상에게 인사를 드리는 절차까지 마쳐야 완전한 며느리로 인정되었다.

이 같은 왕녀하가의를 일반적인 유교 혼례와 비교하면 의혼(議婚) 절차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같았다. 의혼은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절차인데, 개인의 자유연애가 금지되었던 조선시대에는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사가에서는 중매를 통해 양가의 혼인이 성사된 후 혼인의식은 신부집과 시댁을 왕래하면서 진행되었다. 신부의 혼인을 주관하는 주혼(主婚)은 물론 신부의 부친이었다.

하지만 왕녀의 경우는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중매를 서겠다고 나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국사에 바쁜 국왕이 왕녀를 혼인시키기 위해 주혼이 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부마는 중매가 아닌 간택을 통해 결정되었으며, 주혼 역시 왕이 아닌 종친이 대신하였다.

또한 왕녀는 혼인 후 시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살림집을 장만하여 그곳으로 갔는데, 그곳을 왕녀방이라고 하였다. 왕녀방은 혼인이 결정된 후 새로 짓거나 다른 사람의 집을 매입하여 크게 수리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완성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왕녀의 혼인의식은 왕녀방과 부마방에서 진행되었는데 왕녀방은 종친 중의 어느 집에, 부마방은 부마집 또는 부마 친족집 중에서 마련되었다.

이처럼 복잡한 왕녀의 혼인을 진행하기 위해 가례청(嘉禮廳)이라는 임시기구가 설치되었다. 왕이 혼인할 때는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는데 그보다 격을 낮추었던 것이다. 가례청은 부마단자 접수, 혼례에 필요한 물자조달, 의식절차 마련, 궁방 수리 등 혼례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담당했고, 혼례가 끝나면 『가례등록』을 작성한 후 해산되었다.

01. 효종의 둘째 딸 숙신옹주의 추증교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02. 덕온공주의 혼수품인 양념국자(중요민속문화재 제212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03. 덕온공주의 가례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덕온공주가례등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순조의 막내딸 덕온공주의 하가와 혼수품

덕온공주는 16살 되던 헌종 3년(1837)에 하가했는데, 하가는 5월 10일에 공포된 금혼령부터 시작되었다. 금혼령은 덕온공주의 생모인 대왕대비 김씨가 내렸고 대상은 14살부터 16살까지의 미혼남성이었다. 이후 5월 26일에 12명이 참여한 초간택이 거행되었고, 6월 4일에는 5명이 참여한 재간택이 거행되었으며, 6월 25일에 3명이 참여한 삼간택이 거행되었다. 삼간택에서 생원 윤치승의 아들 윤의선이 최종 부마로 확정되었다. 이후 덕온공주의 혼례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덕온공주 하가 때 사용된 자적당의(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먼저 혼례를 위해 대왕대비의 친정인 사동본방에 공주방이 마련되었고, 주혼은 완창군 이시인이 맡았다. 부마방은 윤의선의 본가에 마련되었다. 덕온공주의 혼인에서 간택, 공주방 마련, 주혼 선정 등을 제외한 나머지 혼인의식은 납채, 납폐, 친영, 동뢰, 부현구고, 부현사당의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납채는 7월 4일에 거행되었는데, 혼인약정서인 채서(采書)가 부마의 부친인 윤치승의 이름으로 보내졌다. 이를 받은 사람은 주혼으로 결정된 완창군 이시인이었다. 채서를 받은 완창군은 곧바로 윤치승에게 답장을 보냈다. 납채에 이어 7월 16일에 납폐가 치러졌고 8월 13일에 친영이 거행되었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가는 의식이므로 덕온공주는 미리 궐밖에 나가 기다려야 했다. 8월 13일 오시에 덕온공주는 창경궁의 통화문을 나와 사동본궁으로 가서 기다렸다. 그 사이 남녕위 윤의선은 공동의 본가에서 창덕궁으로 들어가 대왕대비, 왕대비 등에게 인사를 드렸다.

조선시대 왕녀의 혼례는 철저하게 유교예법에 입각해 거행된 왕실혼례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같은 왕녀의 혼례문화를 통해 궁중문화는 양반층으로 확산되었고, 역으로 양반문화는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이어서 남녕위 윤의선은 사동본방으로 가서 덕온공주와 함께 전안례(奠雁禮)를 거행하였다. 이후 남녕위 윤의선과 덕온공주는 저동의 살림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덕온공주는 동뢰연을 거행함으로써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처럼 공주가 혼인과 함께 궁궐 밖으로 나가 사는 것이 출합(出閤)이었다.

덕온공주의 혼례가 진행되는 동안 납채, 납폐, 동뢰 등 각각의 절차에 따라 옷감, 복식 등 예물들이 지급되었다. 이런 예물은 영조 때에 편찬된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房定例)』 등에 근거하여 지급되었다. 이외에도 덕온공주가 출합할 때 곡식, 옷감, 주방용품, 생활용품, 땔감, 반찬 등 신혼살림에 필요한 수많은 물품들이 지급되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덕온공주와 관련된 유물 226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 중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인 덕온공주 자적당의 1점, 제211호인 덕온공주 의복 6점, 제212호인 덕온공주 유물 33점, 제213호인 항아당의 1점, 제216호인 윤용구 복식 4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민속문화재는 유교에 입각해 혼례를 거행했던 조선왕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녀의 혼례는 철저하게 유교예법에 입각해 거행된 왕실혼례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같은 왕녀의 혼례문화를 통해 궁중문화는 양반층으로 확산되었고, 역으로 양반문화는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이렇듯 유교 예법에 따라 거행된 왕녀의 혼례는 양반층에도 모범이 되어 혼례절차나 혼수품에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부마가문에 전해지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바로 그 흔적이자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글 신명호(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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