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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굴로 드러난 조선시대 교도소 - 경주옥사
작성일
2018-08-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89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읍내전도(慶州邑內全圖)」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옥사(獄舍) 유적을 1997년 발굴하였다. 둥근 담장을 둘린 원옥(圓獄) 내부에 2동의 건물과 앞 뒤쪽에 관헌건물터가 존재하였고 담장 바깥으로 4∼5m 너비의 수구가 있어 쉽사리 탈옥하기 어려운 구조가 드러났다. 세종 8년(1426) 전국에 표준설계도인 안옥도를 만들고 배포하여, 여름옥과 겨울옥을 두었고, 남녀 옥을 구분하도록 하교하여 수형자들을 배려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된 동쪽 건물터가 크고 서쪽이 작아 음양배치에 따른 남녀 옥의 구분이 가능하였다. 또한 겨울에 흙벽을 쌓고, 여름에는 이를 허물어 시원하게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01. 경주읍성 지도인 「경주읍내전도」 02. 경주옥사 바깥 수구 03. 경주옥사 북편 초소

옥사 발굴

가물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7년 여름, 경주문화고등학교 이전 후 서부동 19번지 일대에 아파트 건립을 위한 사전 발굴을 진행하던 중 법무부 교화과의 교정사무관이 현장을 방문했다. 우리나라 교정사(矯正史)를 연구하던 중 옛날 옥(獄)터가 국내 처음으로 드러났다는 기사를 보고 달려왔던 것이다. 문헌에 남아 있던 옛날 옥의 운영방식과 구조를 발굴유적과 맞추어 비교하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원형옥으로 만들어진 이유, 남녀 감옥의 분리, 여름옥과 겨울옥의 배치 등 조선시대 때 범죄자에게도 인권을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점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옥의 역사

지금은 죄를 지어 들어가는 곳이 교도소 혹은 구치소라고 부르지만, 옥(獄)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송사(訟事)로 다투는 두 사람의 말이 마치 개가 짖는 소리와 같다’ 하여 만들어진 글자이며 ‘구금장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성책을 만드는데 원으로써 뇌옥과 같더라’ 하여 둥근 감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때는 뇌옥, 영어, 수옥, 형옥(刑獄)이라 불리워졌다. 고려시대 때는 수용자를 관장하는 기관을 ‘전옥서(典獄署)’라 했고,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졌으며, 지방에는 도옥(道獄), 부옥(府獄)과 군옥(郡獄)을 두었다고 한다. 1894년 이후 1923년까지 감옥서와 감옥으로 표현하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형무소라 불리워졌다.


옥의 구조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옥이 발굴되거나 확인된 적은 없고, 조선시대 각종 읍성지도에 그려진 그림으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경주읍내전도(慶州邑內全圖)>에는 둥근 담장을 둘린 원옥(圓獄) 내부에 2동의 건물과 앞쪽으로 관헌건물이 표현되어 있었다. 옥의 담장은 동서 약 40m, 남북 35m의 타원형 구조이며, 담장 하단석열의 폭은 2.9m로 30~40㎝ 크기의 냇돌로 깔아 기단과 같은 형태이며, 상단은 장대석과 면석 등 다듬은 석재로 내외면을 맞추어 ‘凸’와 같은 형태를 띤다. 높이는 최소 3m 정도이며 넓은 기초부분은 탈출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 내부에는 모두 3동의 건물지 기초가 확인되었는데, 동쪽 옥사는 10.9×15.2m의 크기로 165㎡(약 50평)에 이른다. 서쪽 옥사는 7.8×12.8m의 크기로 약 100㎡(약 30평)이다. 북편에는 1×2칸의 건물지 1동이 동서건물의 중앙 북편에 위치하고 있어 관헌들의 숙소로 판단된다. 양 옥은 일반 건물과는 달리 바닥을 파낼 수 없도록 길게 다져 넣은 4열의 줄적심석열들이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남쪽 담장석열 하부는 빗물이 빠질 수 있는 석축배수시설이 있고, 그 옆쪽으로 초석 2매가 남아 있어 문지(門址)로 추정된다. 그 앞쪽으로는 여러 차례 중복된 건물지가 있어 관헌들의 공무소로 판단된다. 담장시설 외부에는 해자형의 수구(水溝)가 확인되었다. 너비는 3.8~4.7m이며 깊이는 80㎝로 내부를 모두 파낸 후 바깥쪽에만 냇돌로 3단 높이로 축조하였다. 그림에 표현된 옥으로 연결하는 남북도로는 신라시대 도로 위에 축조되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옥을 통해 본 애민사상

세종 8년(1426) 표준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를 반포하여 여름옥과 겨울옥을 만들게 하고, 세종 14년(1432)에는 남녀 옥을 구분하도록 하교하는 등 수형자들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된 동쪽 건물터가 크고 서쪽이 작아 음양배치에 따른 남녀 옥의 구분이 가능하였으나, 여름과 겨울을 구분할 수 있는 건물구조가 확인되지 않아 여름에는 흙벽을 허물어 시원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둥근 옥의 구조는 ‘교정교화가 되도록 옥 내에서 모가 난 것을 보지 않도록 했다’라고 해석했고, 서양에서 남녀감옥의 분리는 네덜란드가 1595년에 되어서야 처음 실시하여 조선이 170년이나 빠른 ‘세계최초의 인권국가’라고 한 교정관의 이야기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경주 옥은 19세기 천주교 탄압 때 많은 교인들이 끌려가 박해를 받았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허인백 등 세명이 경주에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지켰다고 전한다. 결국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어 달던 일)를 당했으나,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시 모두 시복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내 보존되어 아름다운 숲동산으로 꾸며져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라 방문할 때마다 가슴 저미는 곳이기도 하다.

04. 경주옥사 서편 옥사(여자옥). 세종대왕은 수형자들을 배려하여 남녀 옥을 구분하도록 하교하였다. 05. 경주옥사 전경
06. 경주옥사 도면


글. 사진. 이은석(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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