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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시골선비 안의와 손홍록
작성일
2009-06-0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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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전주사고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애쓴 용굴안에는 지금도 기와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다. 1991년에야 비로소 이를 기려 내장산 들어가는 길목에다 조선왕조실록이안사적비移安事績碑를 세웠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작은 조형물에 불과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우리 문화재를 지킨 선조들을 두고두고 기억할 지어다. 

1592 4 16, 동래를 급습한 왜적들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한양 도성까지 함락하였지만,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렇듯 전국적인 저항을 가능케 한 힘의 원천이 바로 전라도가 함락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를 간파한 왜적들의 창끝은 서서히 호남의 심장 전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전주 지역에도 5월말부터 불안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의 영정이나 역대 임금의 실록과 수많은 서책들의 안전 문제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이미 성주·충주사고와 춘추관에 비장된 실록들이 병화로 불타버렸기 때문에, 전주사고 실록마저 소실되어 버린다면 조선 역사의 반 토막은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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