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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수유람 문화의 명승. 거창 원학동 수승대
작성일
2008-05-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335



경상남도 서쪽은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남쪽에 이르러 다시 크게 솟아 덕유산과 지리산과 같은 높은 산지를 이루어 심산유곡이 많다. 특히 덕유산 동남기슭에 발달한 화강암 침식계곡 안의삼동安義三洞은 영남 제일의 동천 명승으로 명성이 높았다. 안의삼동 가운데 위천의 원학동猿鶴洞은 계곡이 깊고 길어 아직도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b]수승대에 녹아든 선현들의 자취를 찾아[/b]

원학동의 수많은 동천洞天 중에도 수승대搜勝臺가 가장 경관이 탁월하고 역사적 유서가 깊다. 시내가운데 커다란 거북모양의 바위가 신령스러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주변에 정자와 서원까지 갖추어 조선시대 산수유람 문화의 진수를 누렸던 곳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대문장가 아홉 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정받은 이건창李建昌은 「수승대기」라는 명문으로 명칭의 유래와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대의 옛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 시대에 양국의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했는데, 그 근심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이 대의 빼어난 경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하는데, 수송愁送은 송수送愁라는 말과 같다.’ 한다. 퇴계선생이 시를 지어 갈천葛川 임훈林薰에게 주면서 이름을 바꾸어 수승대搜勝臺라 하고 부터 수승대로 알려졌다. 덕유산德裕山이 동남쪽으로 흘러 영취산靈鷲山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어 금원산金猿山이 되었다. 물이 두 산에서 나오는데, 한데 모여 월성月星 계곡이 되고, 다시 갈천葛川이 된다. 수십 리의 계곡이 모두 맑은 물과 넓은 반석으로 되어 있다. 갈천에서 동쪽으로 몇 리를 내려오면 황산黃山이 된다. 산색이 모두 흰빛인데, 물이 웅덩이에서 멈춘 곳에는 돌까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 그 모습이 한 번 변한다. 여기에서 다시 1리 더 내려가면 여러 번 굽어 도는 물길이 여울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기도 하고 못이 되기도 하는데, 바위는 다시 흰색으로 돌아온다. 산언덕과 바위골짜기가 송림 속에서 빛을 감추고 숨어 있는데, 계곡 위에 드러나 있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이 대臺이다. 대는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며, 위에는 1백여 인이 둘러앉을 수 있다. 이곳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원근의 산봉우리들이 묘하게 둘러서서 예쁜 자태를 뽐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전후좌우에서 공손히 경의를 표하며 우러러 보고 있다. 상류 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옥처럼 영롱하기도 하고 명주처럼 찬란하기도 한데, 네모나고 둥글고 굽고 곧은 것이 날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여, 그 묘한 모양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다. 맑고 수려함이 온축되어 있고, 그윽하고 미묘함이 끝없이 이어져, 그 무엇으로도 다 형용할 수 없을 듯하다. 대 위에는 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패인 구멍에서 자생한 것이다. 사방의 모서리에는 담처럼 돌을 쌓아 놓아 대臺를 만들고, 대의 옆면에는 ‘수승대搜勝臺’라는 세 자와 퇴계의 시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또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와 ‘갈천장구지소’ 등이 새겨져 있다. 이 대 북쪽 시냇가에 정자가 있는데,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요수樂水’는 처사 신권愼權의 호이다. 임갈천林葛川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거했는데, 퇴계가 그렇게 호를 지어주었다.” 시내가운데서 주위를 둘러보는 대臺를 이룬 거북모양의 바위가 신기하다. 하지만 높이가 10m도 되지 않고 길이는 20m를 넘지 못한다. 반석이 넓다고 하지만 수십 명이 모여 앉기에도 좁다. 이처럼 한국명승의 자연경물은 흥을 일으키는 계기를 주는 정도에 불과하니, 수승대 명성의 본질을 산수의 즐거움을 통하여 어짐과 지혜를 가르치고 배운 선현들의 아름다운 자취에서 찾지 못하면 실망이 있을 뿐이다. 수승대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퇴계가 ‘수송愁送’이란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아름다운 경치를 찾는다는 의미의 ‘수승搜勝’으로 대의 이름을 바꾸자는 시를 보내고,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퇴계를 흠모하는 차운 시를 짓게 되면서 부터이다. 퇴계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을 담은 수승대의 주인 갈천의 시는 수승대 동천洞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이별의 아쉬움을 자연의 변천에 비유하여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킨 경지가 담겨 있다. [b]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 花滿江皐酒滿樽 유랑하는 나그네는 연이어 분주히 오가네. 遊人連袂?紛 봄은 곧 지려하고 길손도 떠나려하니, 春將暮處君將去 봄을 근심할 뿐 아니라 그대 보내기도 시름일세 不獨愁春愁送君 [/b] [b]놀이와 학습이 함께 이루어지던 장소[/b] 실제로 거북바위 앞에는 늦은 봄날 계제사를 하고 시회를 하기 위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고, 거기에는

술을 넣어두는 장주갑藏酒岬과 벼루를 가는 연반석硯盤石, 붓을 씻는다는 세필짐 바위가 있다. 수승대와 같은 유교적 명승은 아름다운 자연을 바탕으로 놀이와 학습이 함께 이루어지는 장소라는데 특성이 있다. 따라서 명승지에 서원이 함께 위치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승대 시내 양쪽에는 ‘요수정樂水亭’과 ‘관수루觀水樓’가 있다. ‘요수樂水’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는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수승대에는 요산요수를 구현하는 욕기암浴沂巖, 풍우대風雩臺, 영귀정詠歸亭 등이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는 논어에서 증점曾點 이 “늦은 봄 봄옷이 차려지면, 어른 오륙 인과 아이 육칠 인으로 기수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風乎舞雩,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詠而歸 하니 공자께서 찬탄하시며 나도 너와 함께 하겠노라.”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증점의 학문에 대하여 천지만물과 함께 위아래로 흘러 합일하는 경지로 평하였다. ‘관수’는 맹자의 ‘관수유술觀水有術 ’에서 나온 말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스런 기둥이 품위를 더해주는 구연서원 문루 관수루에는 신권의 후손으로 거창신씨의 중흥조인 신수이의 ‘관수루’ 시판이 있다. 관수루 시는 맹자의 관수유술의 의미를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다. [b]구연서원의 연원은 수사洙泗의 물가에 닿아, 龜淵源接泗洙汀 활발한 맑은 시내 서원의 뜰을 돌아 흐르네. 活潑淸流繞廟庭 끝없이 흘러오니 근본이 있음을 알겠고, 混混續來知有本 유유히 흘러가 스스로 정체함이 없네. 悠悠過去自無停 웅덩이를 채운 뒤 흐르니 천 굽이를 꺼리랴, 盈科豈憚經千曲 용감히 나아가 끝내 큰 바다에 이르리라. 勇進終能達四溟 관수루라는 이름 참으로 의미가 심장하니, 觀水名樓誠有意 형체 있음을 보는 곳에서 형체 없음을 깨닫네. 有形觀處覺無形 [/b]

수승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북바위에 거의 빈틈없이 새겨진 수많은 인명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신愼씨와 임林씨가 많은데, 이는 수승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임훈의 후손 은진 임씨와 신권의 후손 거창 신씨의 오랜 장소 기억투 쟁을 말해주는 경관이다. 이는 가문의 위신이 곧 개인의 성취와 직결되었던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에서 인용한 이건창의 「수승대기」 끝 부분에 두 가문의 분쟁에 대하여 현대인도 공감이 가는 통찰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수승대는 시냇물 속에 있는 하나의 큰 바위일 뿐이니, 전택이나 동산처럼 누구의 소유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소송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기뻐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히 여긴다.” 명승을 즐기려면 좋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명승의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현대인이 수승대와 같은 동천 명승의 참맛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문 시문을 한글로 쉽게 풀이한 문화콘텐츠가 필요하다. ‘요수’와 ‘관수’에 온축된 의미를 알아야 수승대를 명승으로 좋아 하고 즐길 수도 있다. 유람遊覽과 유학遊學은 같은 ‘유遊 ’ 자를 쓴다. 어느 스승 아래서 놀았다는 것은 그분에게 배웠다는 뜻이다. 수승대 유람은 선조들이 요수樂水와 관수觀水를 통해 퇴계, 갈천, 요수선생의 인지지락仁智之樂을 배우고 즐기는 방법이었다. ▶글_ 김덕현 경상대학교 교수,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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