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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동 저전리유적
작성일
2009-04-10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693





발굴의 계기를 마련해준 가짜 선돌 이야기 2005년 3월. 필자는 동양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을 인솔하여 경북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발굴조사 현장으로 향했다. 꽃샘추위의 기승이 만만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겨울 내내 벼르고 벼르던 발굴인지라 조사원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이번에는 뭔가 중요한 발굴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감돌았다. 현장에 도착하니 지난 가을 추수를 끝낸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황량해진 논두렁 사이에 높이 1미터 남짓한 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꽤나 커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저것이 정말 선돌일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한 기관에 사정이 생겨 갑작스럽게 동양대학교 박물관이 조사를 담당하게 되어 유적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발굴조사에 임하였기 때문에 사실 필자는 이날 처음 유적을 둘러보았다.

당초 선돌 1기만을 발굴할 계획이었으므로 조사의 대상지를 좁게 잡았다. 선돌 주변 약 20여 미터만을 조사하기로 하고 발굴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발굴지 주변에서는 도로부설을 위한 교량 공사가 한창이었다. 선돌의 동서남북에 토층 확인용 둑 4개를 남기고 표토에서부터 차근차근 흙을 제거해 나갔다. 그런데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선돌이라고 알려진 돌의 뿌리가 드러났고 그 아래쪽에 조선시대 자기편이 박혀 있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의례공간에서 조선시대의 자기편이 출토되다니. 우리의 선입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석재는 선돌이 아니란 말인가. 이어진 조사에서 선돌로 알려진 석재는 조선시대 이후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며 토지의 경계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박물관 연구원들과 문화재학과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좋은 유적 한 번 발굴하고 싶었는데... 필자 역시 당황스러웠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이 석재가 선돌의 부재가 아니라는 근거가 약하다. 혹 주변에 위치하였던 선돌이 개간과정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달래며 조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박물관의 권순철 연구원을 따로 불러 조사대상지의 북쪽에 긴 도랑을 깊게 넣어보도록 이야기하였다. 그 과정에서 두꺼운 진흙층이 드러났고 진흙의 두께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차 하강하다가 큼지막한 나무토막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조각을 발견하였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이 2,800여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발굴은 이어졌고 2008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조사를 완료할 수 있었는데,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발굴된 계기는 ‘저전리선돌’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문화유적분포지도』에 표기된 ‘저전리선돌’은 발굴결과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져 아쉬움을 주었지만 저전리유적 일대를 개발로부터 보호하고 또 유적발굴에 이르도록 유도한 최고의 도우미라 평가할 수 있겠다.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은 청동기시대 사람들 저전리유적의 핵심은 청동기시대 수리시설이다. 물을 가두어 두는 저수공간과 논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수로로 구성된다. 저수공간은 1개소, 수로는 2개소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높은 산에서 파생되어 나온 야트막한 구릉과 구릉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저수공간은 자연수로를 확장하여 만든 너비 17m, 길이 50m, 잔존깊이 1.8m 규모이며 수로는 저수공간의 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물막이 시설에서 시작하여 낮은 쪽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수로 주변 몇 군데서 토기 무더기가 발굴되었다. 상세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것은 물의 안정적인 공급을 기원하였던 수변水邊제사의 흔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몇 점의 토기 내부에는 박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제사에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박씨는 일본의 제사유적에서 단골로 출토되는 씨앗이며 최근 국내 삼국시대의 유적에서도 출토례가 늘고 있다. 저수공간과 수로에는 진흙과 모래가 겹겹이 메워져 있었고 주로 진흙에서 나무로 만든 농기구, 다리 부재와 곡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목기와 곡물이 원형을 잘 유지한 채 출토된 것은 저수지 내부에 퇴적된 진흙 때문이다. 일정한 습도를 유지한 진흙이 수 천 년의 세월동안 다양한 유기물을 촉촉하게 품고 있었던 것이다.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것은 2점의 절굿공이였다. 보통의 절굿공이는 중간의 손잡이 부위가 잘록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이곳 출토품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안된 것인지 어떤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둥근 돌기 2개가 마련되어 있다. 국내외 자료와 비교해본 결과 가라코·카기唐古·鍵 등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전기前期 유적에서 발견된 절굿공이와 흡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학계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 전기에 등장한 벼농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전해준 것으로 보아왔는데, 저전리의 절굿공이와 저수시설은 한반도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일본열도 전파가 언제 쯤,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는데 유효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경북 안동에 위치한 저전리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사회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특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가 발굴되면서 우리의 역사적인 상식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청동기시대에 대하여 우리가 그려온 이미지 속에는 저수지를 파서 물을 가두고 그 물을 논으로 옮겨 벼농사를 짓는 풍경은 없었다.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삼한三韓시기가 되어야만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의 저수지를 만들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고 또 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런데 청동기시대 가운데서도 연대가 올라가는 시기의 저수지와 관개수로가 발견된 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그 내부에서는 땅을 개간할 때 사용했음직한 돌도끼와 도끼자루, 파종을 위하여 논바닥을 고르던 목제 농기구, 벼이삭을 따던 반달돌칼, 탈곡하여 벼의 껍질을 벗기던 절굿공이 등의 유물이 온전한 조합을 이루며 발굴되었기에 이 유적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수로 내부의 흙을 채질하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벼 껍질을 찾아냈다. 벼 껍질을 찾는 작업은 5명의 직원으로 팀을 만들어 한 겨울에 진행하였는데 마무리하기까지는 3개월이 꼬박 걸렸다. 지루하고 고단한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를 견뎌낸 것은, 이곳에서 찾아낼 볍씨 또는 벼 껍질은 청동기시대에 저전리 일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데 필요한 주요 소재가 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발굴조사는 끝이 났고 유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보고서의 발간 준비 작업이 한창 이다. 저수지와 수로에서 건진 토기조각을 퍼즐 맞추듯 하나씩 맞추어 나가고 있고 목제 유물은 보존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보존처리에 들어갔으며 수습한 곡물 역시 전문가들에게 분석을 의뢰할 예정에 있다. 사실 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지금부터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앞으로도 새로운 지견이 등장하겠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으로도 저전리유적의 조사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경북 내륙의 산골짜기에 대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수리시설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집단이 생겨났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농기구를 활용하여 논농사를 지어 쌀을 수확하고 그 쌀을 절구에 넣어 껍질을 벗긴 다음 밥을 지어먹은 풍경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몇 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그들의 노하우가 쌓이고 또 쌓여 오늘 날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토대가 되었음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 글·사진 | 이한상 문화재위원,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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