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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10년대 대구의 근대화를 따라 골목을 걷다
작성일
2017-12-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178

1910년대 대구의 근대화를 따라 골목을 걷다 - 박물관으로 쓰는 선교사 주택과 우국 정신을 전시한 고택  대구 원도심의 골목은 100여 년 전 예스러운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제에 의해 도로가 나고 상업 건물이 들어서면서 근대의 도시로 변화한 대구 원도심. 그 골목을 따라 만나는 근대 건축물은 박물관과 문화 공연장 등으로 활용되며 오늘을 사는 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선교사 스윗츠 주택

대구 근대문화 골목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일제는 청일전쟁을 구실로 대구에 군부대를 두면서 1904년 경부선 철도와 역사(驛舍)를 건설하고, 당시 읍성 주변부 일대를 격자형 가로체계로 도시계획을 진행했다. 1907년, 원래의 읍성을 허물고 성곽이 있던 자리를 따라 도로를 만들었다. 경상감영부지 한가운데에 십자형 신작로를 내자 감영의 주요 건물과 문들이 파괴되고 읍성 고유의 분위기도 사라지게 됐다. 도로 주변으로 일제의 관공서와 학교, 그리고 상업 건물이 들어서면서 원도심은 근대의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도시보다 대구는 한국전쟁 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현재까지 근대 유산이 다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대구로 피난 온 많은 예술인으로 인해 모나미다방과 백록다방, 녹향 등과 같은 문화공간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근대문화거리가 탄생한 것이다.

도심이 확장됐던 1960년대에는 감영 주변인 계산동, 향촌동 등의 많은 골목이 시내로 연결되는 길목이 되면서 대구 근대 문화의 중심이 됐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고도 경제개발의 붐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골목과 작은 필지로 형성된 원도심부는 개발지로서 매력이 없어 소외되면서 쇠퇴하게 됐고, 그것이 근대의 흔적으로 남게 됐다.

선교사 주택의 가치와 현재의 기능

1893년 대구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단순한 선교 사업뿐 아니라 신식교육과 의료봉사 등의 신문화를 전하며 이 지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일교회를 건설한 선교사와 동산병원을 설립한 존스가 1899년 현재의 동산동(달성토성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부지 일대를 매입해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고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가 있는 서양식 정원을 조성하며 정착했다. 이후 위의 건물들은 1997년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근대 외국인 선교사의 삶과 서양식 공간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선교사 스윗츠 주택(현재 선교박물관)은 대구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던 1910년경에 건축된 사택으로, 스윗츠 여사를 비롯해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헨더슨, 계명대학교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사들이 거주했다. 서양식 붉은 벽돌과 창문으로 벽을 세우고, 한옥형태의 기와를 지붕에 얹은 대구 최초의 한·양 절충식 건물이다. 외관은 1736년 조선 영조 때 대구읍성 축조에 사용된 성돌(城石 : 대구읍성 철거 시 가져와 사용)로 바른 층 쌓기 한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했다. 한·양 절충의 의장특성, 외관 구성 및 벽돌 조적기법 등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은 귀중한 건물로 평가된다. 건물의 내부에서 각종 성경과 선교유물, 성막 모형 및 이스라엘 현지에서 구입한 구약·신약 관련 소품을 관람할 수 있다. 이러한 한·양 절충의 형식은 계성학교의 아담스관, 맥퍼슨관, YMCA건물 등에도 적용됐다. 이로써 대구에는 전통건축인 기와집과 초가, 일본식건물 및 근대서양식건물이 공존하게 된다.

블레어 주택(현재 교육·역사박물관)은 1910년경에 선교사인 블레어와 라이스가 살던 집으로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긴 사각형이다. 외부는 나무로 된 현관과 베란다를 설치했으며 지붕에는 2개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솟아있다. 당시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미국인의 건축, 주거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챔니스 주택(현재 의료박물관)은 선교사 라이너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졌다. 후에 챔니스, 소우텔 등의 선교사가 살았고, 1984년부터 10여 년간 동산병원 의료원장인 모페트가 거주했다. 1800년대부터 1900년대에 사용된 동서양의 의료기기 등이 전시되어 있어 근대의 의료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상화, 서상돈 고택에 담긴 역사적 의미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과 국채보상운동의 대표인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보존되는 데는 대구 최초 시민들에 의한 유산보존운동 덕분이다. 2001년 두 고택을 포함한 주변이 주상복합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을 때, 이곳을 보존하고자 대구의 뜻있는 예술인과 시민들이 ‘민족시인 상화 고택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대구시는 물론 각 관련 단체에 알려 시민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노력으로 철거를 면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국의 분노를 토해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작고 아담한 예쁜 뜰을 중심으로 선생이 집필하던 사랑채, 거주공간인 안채 그리고 별도의 화장실과 창고가 있는 근대한옥의 전형적인 배치이다.

상화 고택과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서상돈 고택은 2006년 국채보상운동 100주년과 때를 같이하여 일부분을 추정 복원했다. 서상돈 고택은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고 유족들도 모두 미국으로 건너간 상황이라 정확한 규모는 잘 알 수 없으며 서상돈 선생의 차남인 서병조의 가족사진으로 추정할 뿐이다. 1970년에 대구의 동서대로인 달구벌대로가 개통되고 도로변이 개발되면서 고택은 헐린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현재의 고택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원래 위치와는 다른 남은 부지에 건물의 부분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재현한 고택은 붉은 벽돌 치장 쌓기로 서양식 큰 대문과 그 옆에 사랑채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에 사랑채는 거지들을 포함한 식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공간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렸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고택은 근대시대에 부자들의 일반적인 주택 형태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고택 모두 근대의 건축형식과 재료 그리고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실내의 가구와 인테리어는 당시를 재현하고 있다. 특히 상화 고택은 상화기념전시관을 신축하고 청구대학의 설립자인 최해청이 살았던 앞쪽 부지에는 상화 마당을 조성하여 현재 각종 문화행사와 거리공연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서상돈 고택은 올해 11월 1일, 국채보상운동기록물로 지역 최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운동과 관련된 건축물인 북후정, 광문사의 복원 그리고 기념관 등의 건립계획과 함께 제대로 된 고택 복원도 계획하고 있어서 기대된다.

 

글‧이정호(경북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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