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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평생 겸양을 실천한 재상,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작성일
2019-10-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31

“상국께서는 지위가 신하 중에 으뜸이지만,공로가 많으심에도 겸손하신 덕[勞謙之德]을 지니셨습니다.”오리 이원익(1547~1634)은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세 임금을 보필하면서 왜란과 호란을 수습하고 대동법 (大同法)1)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여 준 명재상이었다. 또한 이원익은 당대 문인들로부터‘온화하고 공손하며[溫恭] 공로가 많음에도 겸손한 덕[勞謙之德]’을 갖춘 재상으로 추앙받았는데2), 그가 실천한 ‘겸양의 사례’를 살펴보며 진정한 겸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0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이원익선생영정. 평양 백성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에 봉안되었던 영정으로, 평양의 승려 화가가 백성들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충현박물관

1) 대동법(大同法) : 조선시대 공물(貢物)을 쌀로 환산해 거두어들이던 조세제도이다. 이원익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1608년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2) 『동계집(桐溪集)』 2, 「上李相書」. 정온(鄭蘊, 1569~1641)은 「이 상국께 올린글」에서 이원익의 겸손함을 주공(周公)에 비교하며 칭송하였다.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모습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문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에 제수되었다. 그는 선조의 어가(御駕)를 모시는 한편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을 포상할 것을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원익은 평안도 관찰사(觀察使)로 재임할 때 부역을 줄이고 폐단을 없애는 선정을 베풀어 온 도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훗날 이원익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이를 아쉬워한 많은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영정(影幀)을 봉안해 은덕에 보답했는데, 오히려 그는 사당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질 것을 염려하여 허물도록 하였다.


1603년(선조 36) 선조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여러 신하들을 공신으로 녹훈(錄勳)했다. 이원익은 나라를 위해 싸운 공적과 임금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공신(宣武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의 명단에 둘 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그동안 함께 고생한 군사들과 장수들이 많은데 아무런 공 없는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추천을 사양했다.


이후 조정의 결정에 따라 이원익은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이를 자랑하지 않았고 공신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혜택도 정중하게 사양하는 미덕을 보였다.

02. 이원익의 손자 수약이 연풍현(지금의 충북 괴산)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목민관으로서 유념해야 할 덕목을 당부한 글이다. ⓒ충현박물관

너그럽고 인자한 윗사람의 모습

이원익은 어떤 모습의 상사였을까? 그는 관직에 있었을 때 일처리가 매우 꼼꼼했다. 그는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재임할 당시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몸소 구휼을 위한 쌀을 집집마다 공평하게 배분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제했다. 보통 꼼꼼한 성격의 상사들이 권위적이고 엄격한 면모도 함께 가지고 있다면, 이원익은 이와 달리 부하 직원을 대할 때 인자하고 너그러운 면모를 보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젊은 시절, 조선의 8대 임금 예종(睿宗)의 능묘인 창릉(昌陵)의 제례를 주관하게 된 이원익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에 속한 어린 종이 제수음식에 손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종을 나무라거나 책임을 묻는 대신 밤새 서울로 달려가 제수를 마련해왔고 종이 엄벌을 받지 않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략하자 이원익은 81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세자를 보필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업무에 서툰 부하가 있었는데 일처리가 미숙해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부하를 절대 꾸짖지 않고 일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독려하는 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듬해, 손자인 이수약(李守約, 1590~1668)이 연풍현감(延豐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자 편지를 보내 ‘남에게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말 것’, ‘자신의 주장만 옳다 여겨 민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를 통하여 이원익의 너그러움과 인자함은 그의 겸손한 자세에서 발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03. 오리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고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694년 건립되었다. 일반적인 종가의 사당에는 위패를 모시지만, 이원익 가문은 사당의 내부에 감실을 두고 영정을 봉안했다. ⓒ충현박물관 04. 오리 이원익 묘소 ⓒ충현박물관

비바람도 막지 못하는 초가에서 사는 검소한 모습

40년간 재상을 역임한 이원익은 사치를 부리지 않고 여느 서민처럼 생활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집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재상의 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인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승지(承旨)를 보내 사실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원익의 집이‘겨우 몸을 움직일 만한 두어 칸 초가로 누추해 비바람조차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원익의 검소함과 청렴함에 감복한 인조는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재상의 지위에 걸맞은 정당(正堂)3)을 지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원익은 여러 차례상소를 올려 “나라의 우환이 심각하고 궁색한 때 집을 짓는 것은 부당하므로 죽는 한이 있어도 명을 받들지못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른 고을로 옮겨가고자 하였다.


이에 인조는“정당을 하사하는 뜻은 경이 국가를 위해 헌신함에 따른 보답이며 관료와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것”이라며 이원익을 배려하고 끝내 사양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검소한 모습은 자신이 재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므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겸손함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자기 홍보(PR, Public Relation)’가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 현대사회에서 오리 이원익이 보여준 겸양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겸양을 단순하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예절’ 또는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는 전통적인 관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원익의 겸손에는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녹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는 이원익이 살았던 조선시대보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의 공로를 가로채거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점점 더 각박해져가는 사회에서 오리 이원익이 실천했던 ‘겸양’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정당은 훗날 ‘이원익의 검소함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한다’는 인조의 교서를 인용하여 관감당(觀感堂)으로 불렸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점점 더 각박해져가는 사회에서 오리 이원익이 실천했던‘겸양’의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0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 관감당.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이다. 관감당의 의미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충현박물관


글. 허문행 (충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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