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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화를 이루기 위한 전통혼례의 절차
작성일
2014-04-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5065

조화를 이루기 위한 전통혼례의 절차
예로부터 관혼상제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혼례. 전통적으로 혼례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가족과 가족이 만나는 ‘인륜의 시작’으로, 의례를 함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하고 까다로웠다. 전통혼례에는 일정한 의식 절차가 정해져 있으며, 이는 신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배우자를 구하는 일에서부터 혼인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성과 예를 다하려 노력했다.

 

혼례를 준비하는 단계

우리의 전통 혼례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도입된 주자성리학의 『주자가례』에 큰 영향을 입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의 혼례를 우리 실정에 맞게 변용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곳에서 제시된 의식들을 온전하게 시행하려고 노력한 편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건국초기부터 지속되었지만, 『주자가례』가 정착된 것은 한참 뒤인 조선왕조 후기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주자가례』는 혼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지만, 끝내 우리의 고유한 혼인 예식을 모두 대체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사대부와 양민은 물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옛 전통의 우리 방식과 주자성리학의 방식이 결합된 혼례를 따르게 되었다. 여기에 각 지방의 풍속들이 세세한 변화를 주어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된다. 이 글에서는 조선중·후기 양반 사대부가와 양민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혼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예서(禮書)와 달리 실제로 행해졌던 혼례 절차는 혼인 예식이 거행되는 사전과 사후를 구분하여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곧 혼례를 준비하는 단계, 혼례 당일의 예식, 혼례 예식 후의 마무리 등이 그것이다. 이 단계들 아래에는 몇 가지 하위 절차들이 있는데, 굳이 전통혼례만이 아니라 현재에 통용되는 신식 결혼식에서도 이 절차들이 계승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혼례의 사전 단계는 의혼(議婚, 혼례를 논의함)이라고 하며, 여기에는 사주단자를 보내고 함을 지는 아래 절차들이 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혼례의 흔한 풍습이다. 가장 먼저는 중매인이 양가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한 여러 문제들을 조율한다. 이어 신랑 집에서 혼인의 의사를 전달하면 신부 쪽에서 허락을 한다. 허락과 동시에 신랑과 신부의 사주(四柱)를 맞춰보고 사주단자를 보낸다. 이 절차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만일 이런 저런 불상사가 생겨서 혼인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사주단자를 받지 않아야 한다. 이 절차를 거친 뒤에 혼인을 거절한다면, 이혼이 될 정도로 혼인 의사는 매우 중시되었다.

01. 사주단자. 신랑집에서 혼인의 의사를 전달하면 신부쪽에서 허락을 한다. 허락과 동시에 신랑과 신부의 사주(四柱)를 맞춰보고 사주단자를 보낸다. ⓒ한국국학진흥원
02. 1784년 정종로 혼서(납폐서). 정종로가 그의 맏아들 상기를 장가보내는데, 이미 사주단자를 교환하여 신랑 신부의 궁합이 맞다는 길점을 얻었고, 이에 신부 측에 폐물을 올리는 납징례를 행하기 위해 사자와 더불어 이 문서를 보냈다. ⓒ한국한중앙연구원

사주는 신랑과 신부 두 남녀의 태어난 연월일시의 때(時)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서, 두 인연이 참으로 길(吉)하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는 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전통 농경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잘 지어야 하는 농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주를 받은 신부집에서는 혼례 날짜를 택일해 신랑집에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낸다. 이쪽에서 받았으니 저쪽으로 다시 보낼 차례이다. 귀한 집 딸을 얻었으니 신랑집에서 기분이 아니 좋을 수 없다. 그래서 격식을 차려 신부집에 옷감, 이불, 음식, 예물 등을 보낸다. 이어 혼례의 사전 단계에서 가장 유명한 함이 등장한다. 이를 납폐(納幣)라고 하며 신부에게 줄 폐물과 옷, 혼인문서인 혼서지(婚書紙)를 함에 담아 보낸다. 함잡이들이 신부집에 방문할 즈음이면 혼례는 이미 사방에 다 알려지게 된다.

신랑과 신부의 집에서 주고받는 예물은 혼례의 폐단으로 지목되기 쉬웠다. 예를 들어,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혼수를 마련하는데 많은 재물이 들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집을 망칠 징조라 하고, 어린 딸이 죽으면 돈을 벌었다고 위로 하는데, 이는 인륜과 도덕의 타락이다”(『사소절』)라고 하여 혼례의 타락을 개탄하였다. 현대의 혼례문화에도 이는 부정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혼례 당일의 예식

의혼을 지나고 드디어 혼례의 본격 예식인 대례(大禮)가 치러진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장가를 들러 가서 치르는 모든 의례가 여기에 속한다. 대례에는 현대에 유행하는 혼례에서처럼, 혼례의 의의를 밝히고 혼례의 성사를 주관하는 주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다. 다만 예식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사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집사)이 있을 뿐이다.

신랑이 여러 일행들과 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醮行)이라고 한다. 이 때 부정을 막기 위해 신부집에 들어설 때 짚불을 넘어가는 등의 민속도 행해진다. 이어 신랑이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예식인 전안지례(奠雁之禮)가 행해진다. 기러기는 백년해로(百年偕老)를 기원하는 혼례의 성스러운 약속을 상징한다. 이 전안지례는 특이한 절차이다.

신부집에서는 기러기를 맞이하기 위해 전안상을 차리고, 신랑은 전안상에 기러기를 놓고 공손히 절을 올린다. 이어 신부의 어머니는 기러기를 치마에 조심스럽게 안고, 기러기를 신부방에 던지는데, 이를 통해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를 점치기도 한다. 기러기가 똑바로 놓이면 예상하듯이 아들이다. 기러기를 높이는 것은 역시 백년해로의 지극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 중 신행.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나무기러기를 든 기럭아비가 앞에 서고 백마를 탄 신랑이 뒤에 선다. ⓒ국립중앙박물관

신랑과 신부가 부부의 예로 절을 하는 절차가 이어진다. 교배지례(交拜之禮)이다. 이 의식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신랑이 처갓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 신부가 머리를 얹는 치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잘 차려 입은 신부가 나오고, 드디어 마주 서게 된 둘 사이에는 교배상이 차려지는데 여기에는 촛대, 소나무, 대나무, 꽃, 닭, 쌀, 밤, 대추, 술잔 등을 놓는다. 이들은 가정의 화목을 빌고, 떡두꺼비 같은 아이들을 낳아 정승판서를 시키라는 소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이어 신랑과 신부가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지례(合巹之禮)가 이어진다. 술을 교환하여 부부일심동체가 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서로 절을 올리고, 술을 나눠 마시는 절차는 온전히 중국의 예식을 들여온 것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내려온 독특한 풍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혼례식이 남성 중심인 것에 비해 우리의 예식 절차를 보면, 비록 중국의 영향 속에서도, 여성을 중심으로 하거나 동등한 위치를 강조한 측면이 많이 발견된다.

신방(新房)은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절차이다. 축하객들의 짓궂은 장난도 끝이 나면, 날이 새고 아침 일찍부터 장인과 장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인근의 친척들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 점심 무렵이 되면 신부집안 사람들이 신랑을 거꾸로 매달거나, 냇가에 밀어 넣고, 고운 색시를 훔쳐간 도둑이라고 몰아붙이며 텃새를 부린다.

지체 높은 양반가에서는 신랑의 학식을 떠 보려고 운(韻)을 던져 시를 짓게 하기도 한다. 이를 동상례(東床禮)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신랑을 호되게 다루는 방법이 다양하다. 이는 낯설고 서먹서먹한 관계를 가족 간의 끈끈한 정(情)으로 바꾸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혼례 예식 후의 마무리

이제 혼례의 사후 단계인 후례(後禮)가 남았다.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랑은 본가로 돌아갈 차비를 하는데, 신부 입장에서는 시집가는 일이 남은 것이다. 이를 우귀(于歸)라 한다. 혼례 당일에 돌아가는 경우가 『예서』에서 제시한 표준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서 시집에 가거나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시집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우리의 고유한 혼례 관습이 지속된 것이다. 이러한 혼례 풍속은 삼일을 보내고 시집가는 의식으로 점차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때에도 신랑은 당일 혼례를 치르고, 이틀 정도 처갓집 근처에서 묵다가 삼일이 되어서야 신부를 데리고 본가로 향할 수 있었다.

신부는 꽃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향하는데, 18세기 무렵의 기록을 보면(『경도잡지』), 양반집은 8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4쌍의 청사초롱과 12명의 여종들이 음식과 예물을 이고서, 유모와 하인들이 전후좌우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는 부유한 양반네들의 상황이고 대부분은 4명이 메는 가마나 2명이 드는 꽃가마를 탔다. 신부가 시집에 오면 시집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려야 한다. 이를 현구례(見舅禮)라 하는데, 보통 폐백으로 부르고 있다. 폐백은 술 한 동이와 안주 다섯 그릇을 지참하는 것이라 법을 정했지만(『경국대전』), 이도 양반네에서나 있는 일이고 일반 양민들은 육포 한 접시 정도였다. 어쨌든 푸짐한 음식으로 상을 차리고 술을 따라 올려 절을 한다. 평생을 함께 보내야 하는 새로운 가족들에게 하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시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셔도, 첫 절은 시부모에게 먼저한다. 이어 연령과 세대 순으로 한다. 시집 식구들이 새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예물을 주거나 대추와 밤을 치마에 던져 주기도 한다. 대추와 밤은 자손을 많이 두라는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 시집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숨은 의미도 있다. 새 사람을 맞는 잔치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는 시집에서의 일상적인 삶이 시작된다. 하지만 혼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집에서 생활을 한 뒤에, 친정으로 나들이를 가는 근친(覲親)의 절차가 남았다. 이는 사돈댁에 대한 매우 정중한 인사가 된다. 비록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양가의 예법은 절도를 지켜야 한다. 보통은 첫 농사를 거둔 다음에 수확물이나 예물을 갖추고, 푸짐한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신랑과 함께 동행한다. 딸자식도 반갑지만, 백년손님인 사위 대접이 융숭해야 한다. 그러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주로 그런 것이고, 형편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평민들은 떡과 술을 준비했다.

사위를 친정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본가로 돌아갈 때는 푸짐한 예물을 답례로 딸려 보낸다. 이렇게 근친이 끝난 뒤에야 혼례를 다 마친 것이다. 그래서 혼례의 기간은 짧아도 1년이고, 우귀의 기간을 생각하면 길게는 몇 년에서 십년 이상도 걸릴 수 있다.

우리의 전통 혼례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혼인의 성립에서 끝마치는 기간이 매우 길고, 절차들이 매우 세심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는 혼인에 대한 이해가 개인들의 결합이라는 생각보다는 서로 다른 성(姓)이 합치는 것, 즉 가문과 가문의 만남, 서로 다른 지역의 풍속이 만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숙성의 기간을 길게 두고 절차 역시 복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폐습 또한 적지 않았다. 예식의 내용은 두 가문이 서로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양가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허례와 허식의 경쟁심리가 적지 않았다.

전통 혼례에 담긴 혼인의 정신이 현대의 혼인에 계승되는 방식은 어떤 모습이 가능할까. 아마도 혼례의 세심한 절차에 담긴 두 가문과 두 남녀의 혼인에 대한 신중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보존시키면서, 허례허식의 경쟁심리와 이를 반영한 혼례절차를 개선하거나 타파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평생도> 중 혼인식. 시댁 어른들에게 신부가 첫 인사를 올리는 현구례(見舅禮)의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글 이창일(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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