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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조선왕실의 취향⑬- 영조(한국일보, 20.3.7)
작성자
이종숙
게재일
2020-03-07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2042

조선왕실의 취향⑬ -영조(한국일보, 20.3.7)

영조도 사도세자도... 유비 제갈량 손오공에 홀리다
 

글/ 이종숙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삽도1_영조어진.jpg

영조의 어진.

영조 생전 어진을 1900년에 옮겨 그린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참신하고 개성 있는 한문문체를 금지하고 당송팔대가와 같은 모범적인 고문(古文)을 따르도록 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한 정조(正祖ㆍ1752~1800)는 소설도 잡서로 규정하여 선비들이 읽는 것을 금지했다.

정조 본인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심지어 그는 한 번도 소설책을 펼쳐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숙직 중에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로 관리들을 파직하기까지 했다.

 

학자군주 정조의 시각에서 보면 허구로 가득한 소설은 그 가치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궁궐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기에 그 안에서 소설을 애독한 이들이 다수 있었고, 그 중에는 정조의 조부모인 영조(英祖ㆍ1694~1776)와 영빈이씨(暎嬪李氏ㆍ1696~1764), 그리고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ㆍ1735~1762)가 있었다.

 

영조보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궁중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소설 읽기를 즐겼던 부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효종(孝宗ㆍ161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ㆍ1618~1674)이다.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의 후손인 심익운(沈翼雲ㆍ1734~1782)의 문집 ‘백일집(百一集)’에 실려 있는 ‘인선왕후 어서 언서삼국연의 발(仁宣王后 御書 諺書三國演義 跋)’에 의하면 효종과 인선왕후가 함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우리말 번역서를 제작한 것으로 확인된다.

궁중에서 한가로울 때 효종이 ‘삼국지연의’를 친히 번역하여 읽어 주면 왕후는 그 내용을 호지(糊紙ㆍ풀 먹인 종이)로 만든 공책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간간이 궁인(宮人)이 대신 쓰게 하는 방식으로 완성된 ‘삼국지연의’ 한글 번역본은 숙명공주의 청에 따라 그에게 하사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국지연의’는 위(魏), 촉(蜀), 오(吳) 3국 정립을 거쳐 진(晉)나라 성립까지의 역사를 소설화한 작품으로 16세기 초 조선에 처음 들어온 이후 사대부만이 아니라 부녀자와 민간에까지 폭넓게 보급되었다.

효종의 경우 부인과 함께 직접 한글 번역서를 만들 정도였으니, 영웅과 호걸들의 활약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의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경우 신하들이 읽어주는 것을 듣는 방식으로 소설을 감상했다는 점이 독특한데, 이 사실은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년) 12월 19일 기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영조에게 탕약을 올리러 왔던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 김상로(金尙魯)가 영조의 취침을 돕기 위해 언문(諺文ㆍ한글) 소설책을 읽어드리겠노라 청하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른 이가 읽어주는 한글 소설을 들으며 스르르 잠드는 영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뒤에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언문 소설을 진언(陳言)하겠다는 김상로의 말에 영조는 잠드는 방법으로는 언문책보다 진서(眞書), 곧 한문책이 낫다고 하며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어떤 부인이 아이가 울자 책으로 아이를 덮어 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아이 어머니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물었다.

아이 어머니의 대답인 즉 ‘아이의 아비가 평소 책을 잡으면 눕고, 누우면 잠이 드니, 아이도 책으로 덮어 잠이 들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조가 한 말들을 종합하면 어려운 한문 소설보다는 쉬운 한글로 씌어진 소설이 더 재미있으니, 결국 불면증에는 한문 책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이보다 훨씬 전부터 영조가 병석에 있는 자신을 위해 신하들로 하여금 소설을 낭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요즘 유행하는 오디오북처럼 음성으로 지원되는 소설 탐독은 영조가 누린 특별한 취미 생활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가 신하들을 시켜 읽게 한 소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조가 직접 읽었던 소설들이 일부 확인되는데 그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삼국지연의’를 자세히 새기며 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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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가 소장했던 한글 소설 ‘손방연의’. 본문 첫 번째 면에 영빈이씨의 소장인 ‘영빈방’ 인장과 항아리 모양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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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언해’에 날인된 ‘영빈방’ 인장과 항아리 모양 인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도 소설을 즐겨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창덕궁 낙선재에 보관되어 있던 필사본 한글소설 84종 2,000여책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 중에 영빈 이씨가 소장했던 책들이 몇 종 포함되어 있다.

‘고문진보언해’ ‘무목왕정충록’ ‘손방연의’ 총 3종의 도서에 ‘暎嬪房(영빈방)’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이들이 영빈 이씨의 장서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영빈방’ 인장은 각 책의 본문 첫 면에 찍혀 있는데, 안에 ‘內(내)’자가 있는 항아리 모양 인장이 ‘영빈방’ 인장과 상하로 짝을 이루어 찍혀 있는 점이 이채롭다.

 

‘고문진보언해’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문을 모아 엮은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에 수록된 글을 발췌하여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다른 두 편의 작품은 명나라 소설의 한글 번역본으로, ‘무목왕정충록(武穆王貞忠錄)’은 남송(南宋)의 역사를 배경으로 무장(武將) 악비의 활약상을 그렸고, ‘손방연의(孫龐演義)’는 진(秦)ㆍ초(楚)ㆍ연(燕)ㆍ한(韓)ㆍ조(趙)ㆍ위(魏)ㆍ제(齊) 일곱 나라가 세력 다툼을 벌이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연나라 손빈(孫臏)과 위나라 방연(龐涓) 두 사람의 전략 대결을 그렸다.

 

이들이 영빈 이씨가 소장하고 읽었던 소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여성 취향의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남성 주인공들의 갈등과 대결을 그린 소설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영조와 영빈 이씨의 소설 애호는 일상적인 여가 활동 수준이었던 반면, 사도세자에게 소설은 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도세자가 소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가 편찬한 소설 삽화집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사도세자가 붓을 들어 직접 쓴 두 편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총 128면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림은 사도세자의 명을 받아 당시 궁중 화원이었던 김덕성(金德成) 등이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가는 묵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그림은 책장의 각 면에 한 장면씩 그려져 있으며, 그림 상단 바깥쪽 여백에 각 장면의 제목이 한글로 적혀 있다. 이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소설 삽화를 본떠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필로 쓴 서문에서 사도세자는 사서(四書) 육경(六經) 및 제자백가(諸子百家) 같은 고전 외에도 패관소사(稗官少史ㆍ민간의 이야기나 전설 등)에 해당하는 많은 책들이 있다고 하며 그러한 종류의 책 제목을 일일이 나열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 중 귀감이 될 만한 것과 웃음을 주고 사랑할 만한 것을 뽑아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사도세자가 나열한 93종의 책 중 소설은 74종에 이르며, 이 책에 실려 있는 삽화들이 유래한 소설은 ‘서유기’ ‘수호지’ ‘삼국지연의’ ‘전등신화(剪燈新話)’ ‘손방연의’ 등 10여편이다. 이 중 ‘서유기’ 삽화가 40면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사도세자는 ‘서유기’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삽도4-중국소설회모본-서유기 화과산수렴동.JPG

사도세자가 편찬한 ‘중국소설회모본’에 수록된 ‘화과산수렴동’.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의 고향인 화과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화과산을 “일 년 사계절 꽃이 피고 일 년 내내 과일이 가득한” 선인들의 산이라고 묘사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어떤 면에서 사도세자의 소설 애호는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에 따르면 그에게 소설은 병을 치료하는(求病) 수단이기도 했다.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탐독했던 수많은 소설들은 불안하고 불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도세자는 임오년(1762년) 윤5월 9일에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그가 뒤주에 갇히기 불과 나흘 전 일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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